저번 포스팅에서는 내 세계관이 어떻게 조합이 되어있고, 내 생각이 어떻게 세상을 보는지 이야기했었는데. 그 토대가 동양적 철학관의 중심으로 다중적시야를 보려고 하는 것이라면. 이제는 서양적 철학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미학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하고, 세계관을 확장 시 나가는 것도 좋아하고. 인류의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생각하는 방법"에 따른 방법론을 지속적으로 이야기 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우울함의 세계관 속에서, 서양철학적 세계관의 확장이 굉장히 많은 위로가 되었었고, 지금도 마음이 불안정함을 느낄 때마다, 관련 책을 읽거나 혹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것을 좋아하기도 한다. (물론, 블로그 또한 그 연장선에 있다).
그렇기에, 첫 대학교에서 서양철학의 이해 과목을 들은 것은 나의 세계관을 좀 더 명확히 해준 것 중하나이다. 내가 좋아하는, 아니 존경하는 선생님이 그때의 나의 역할을 충분히 정해주었으니까. 물론, 지금의 세계관과 가치관이 그때당시의 가치관과 평행선을 가는 것은 아니다. 삶이 변화함에 따라 생각의 방식과 태도의 방식도 바뀌었고, 이에 따라 나의 주변이 바뀌어져 가는 것도 보았으니까.
저번에 내가 해석하는 세상이란 :: 살리에리의 인생살이 채널의 글에 이어서, 그 관련 두 번째 포스팅이 되겠다. 이전 포스팅이, 나의 생각적 토대가 어디서 왔는지 말한다면, 이번의 포스팅은 나의 생각적 방향성을 말하고 싶다. 토대는 그 본질이 단단해야 방향을 정 할 수 있다고 혹자들은 말하지만, 인간의 "생각"의 토대는 "유연성"에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렇기에 전체적인 상황과 맥락을 고려하고 사회적인 합의와 인문학적 가치를 고려해 생각을 유연하게 갖고 있어야 하며 동시에 그 방향은 마치 그 유연한 생각의 위를 유영하는 배처럼 견고하게 설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바다 없는 배는 항해를 하지 못하며, 배 없는 바다는 사람을 가두는 감옥일 뿐이다
그러니 생각의 유연함으로 나의 "바다"를 정의하고 견고함으로 무장된 "배"를 그 위에 띄우는 것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사고하고 생존하기 위한 것이라고 나는 재차 주장한다. 왜, 바다와 배의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오늘의 제목에서 알 듯,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이다. 서양철학을 공부해 본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그리고 가장 재미있고, 그리고 가장 비극적인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는 다시 한번 길을 잃은 우리 시대에도 길을 잃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전달해주고 있어 좋은 귀감 되어주고 있다.
본론
이타카라는 방향성을 예찬하며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이었지만, 그의 진정한 이야기는 전쟁이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가는 10년의 여정에서 시작된다. 포세이돈의 분노를 사서 바다 위를 떠돌게 된 그는 식인 거인 키클롭스, 마녀 키르케, 거대한 소용돌이 카리브디스 등 수많은 위협과 마주하며 동시에 자기만의 지혜로 이겨내면서 다음 페이지에 도달한다.
겉보기에 그의 10년은 지독한 '길 잃음'의 연속이다.
하지만 철학적 관점에서 오디세우스는 단 한 번도 길을 잃은 적이 없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돌아가야 할 고향, '이타카(Ithaca)'라는 명확한 목적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우리는 '방황'과 '표류'의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표류가 목적지 없이 그저 파도(외부의 상황)에 휩쓸리는 것이라면, 방황은 목적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센 풍랑으로 인해 잠시 우회하는 과정일 뿐이다. 10대 후반과 20대 초반, 내가 우울의 세계관 속에서 허우적댈 때 서양철학이 내게 준 위로가 바로 이것이었다. 내가 의도하였던, 그것이 의도되지 않았던, 본래의 20대의 흐름을 살아간 것은 아니었었다
"너는 지금 길을 잃고 표류하는 것이 아니라, 너만의 이타카를 찾기 위해 거친 바다를 방황하며 나아가는 중이다."라는 위로를 주는 것은 길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모든 이들에게 작은 위로를 주는 것인 게 분명하다.
본능의 바다
오디세우스 일행이 마녀 키르케의 섬에 닿았을 때, 그녀는 마법의 약을 탄 진수성찬으로 부하들을 유혹한다. 배고픔과 욕망에 눈이 멀어 허겁지겁 음식을 탐한 부하들은 모두 이성을 잃고 짐승(돼지)으로 변해버린다.
이 에피소드는 인간이 목적의식을 잃고 순간의 쾌락과 본능이라는 바다에 무방비로 몸을 맡길 때, 어떻게 스스로의 존엄성(이성)을 잃고 마는지에 대한 통렬한 철학적 비유다. 오디세우스는 헤르메스가 준 해독제(이성과 철학적 깨달음)를 품고, 단단한 결기를 상징하는 칼을 빼들어 그녀의 마법에 대항한다. 생각의 유연함을 가지되, 그것이 타락과 쾌락으로의 함몰을 의미해서는 안 된다는 가치였다.
우리의 '배'는 욕망 앞에서도 스스로를 잃지 않을 만큼 견고한 이성의 뼈대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나는 이 에피소드를 아주 잘 기억한다. 한창 20살이 되었을때, 이 오디세우스라는 작품 속에서 감각적으로 읽고 여러번 읽고, 그리고 동양적 해석을 찾기도 햇으니까. "돼지"라는 점에서, 우리기억속에는 말을 하지도 않아도 머릿속에서 지나가는 작품이 하나가 있을 것이다.
세이렌의 노래
여정 중 가장 철학적인 은유를 담고 있는 또 다른 부분은 단연 '세이렌(Seiren)'의 일화다.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뱃사들을 유혹해 바다에 빠져 죽게 만드는 섬을 지날 때, 오디세우스는 부하들의 귀는 밀랍으로 틀어막되,
선장인 자신은 돛대에 몸을 꽁꽁 묶은 채 그 매혹적인 노래를 두 귀로 직접 듣는다.
세이렌의 노래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며 마주하는 수많은 가치관, 유혹, 그리고 팽배한 사회적 욕망들이다. 부하들처럼 귀를 막는 것은 세상과 단절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오디세우스는 세상의 다양한 맥락과 가치(노랫소리)를 온전히 수용하면서도, 그것에 휩쓸려 파멸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돛대(자신의 철학적 토대와 방향성)에 단단히 묶었다.
타인의 생각과 시대의 흐름을 유연하게 받아들이되, 나의 자아를 지탱하는 돛대는 견고하게 세워두는 것.
칼립소의 낙원을 거절하다: 영원한 정박 대신 고난의 항해를
오디세우스의 단단함을 보여주는 또 다른 일화는 님프 '칼립소'와의 만남이다. 칼립소는 그에게 영원한 생명과 고통 없는 평온한 낙원을 약속한다. 하지만 오디세우스는 그 달콤한 제안을 거절하고 다시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로 나간다. 그것이 기다리는 자에 대한 존중이요 동시에 떠나간 자들에 대한 존중이라고 나는 해석했다. 동시에 이 이야기를 예찬 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안전하지만 갇혀있는 삶(배 없는 바다) 대신, 상처받더라도 자신의 의지로 나아가는 삶(바다 위의 배)을 택한 오디세우스. 그의 선택은 오늘날 상실감과 허무주의에 빠진 우리에게 묵직한 울림을 준다. 우리는 때때로 안락한 동굴로 도피하고 싶어 하지만, 결국 우리를 살아있게 만드는 것은 끝없는 질문과 생각으로 무장하고 다시 세상의 바다로 나아가는 그 '의지'에 찬가 하고 싶었다.
페넬로페
오디세이아는 한 사람의 영웅적인 여행과 여정의 이야기 같지만, 동시에 그것은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만의 바다를 건너는 여러 명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오디세우스가 밖에서 거친 파도를 가르며 물리적인 항해를 한다면, 아내 페넬로페는 안에서 기다림이라는 또 다른 형태의 여정을 이어간다.
우리는 흔히 '기다림'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멈춤의 미학' 혹은 수동적인 상태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페넬로페의 기다림에는 또 다른 여정의 숭고한 가치가 숨어 있다. 그녀는 왕좌를 노리는 수많은 구혼자들의 폭력적인 압박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았다. 낮에는 시아버지의 수의를 짜고, 밤에는 그것을 몰래 풀어버리는 지혜를 발휘하며 무려 20년을 버텨냈다.
즉, 페넬로페의 기다림은 단순히 누군가를 의존적으로 기다리는 멈춤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삶의 목표와 사랑이라는 가치를 굳게 믿고 유지하는 것에서 비롯된 '능동의 미학'이었다. 육지 위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몰아치는 세상의 파도에 맞서 '견고한 배'를 지켜낸 위대한 항해였던 것이다. 내가 향하고자 하는 삶의 목표와 가치관(이타카)은 어느 날 갑자기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페넬로페가 낮밤으로 베를 짜고 풀었듯, 나 스스로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 흔들림 없이 인내하고 치열하게 고민할 때 비로소 그 목적지는 온전한 나의 것이 된다.
결어
나의 20대 초반은 어쩌면 포세이돈의 저주를 받은 오디세우스의 배 위와 같았을지도 모른다.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고, 주변의 파도는 너무 거칠었다. 하지만 그때 만난 서양철학의 가르침과 존경하는 선생님의 존재는 나를 돛대에 단단히 묶어준 밧줄이었고, 키르케의 돼지로 변하지 않게 해 준 이성의 약초였으며, 내가 향해야 할 이타카를 가리키는 나침반이었다.
시간이 흘러 나의 삶은 변화했고, 나의 세계관도 그 이전과는 완전히 같지는 않다. 하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세상이라는 바다는 예측할 수 없이 유연하게 출렁이고, 나는 그 위를 유영하기 위해 나의 배를 끊임없이 수리하고 단단하게 만들고 있다. 가끔은 칼립소의 섬처럼 안락한 유혹에 흔들리기도 하지만, 내 안의 페넬로페가 멈춤이 아닌 능동적인 미학으로 지켜내고 있는 궁극적인 삶의 방향성을 떠올리며 다시 노를 쥔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이타카를 향해 항해하는 오디세우스이자, 다른 이들의 가치적 성공을 기원하는 페넬로페다
지금 당장 눈앞에 섬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길을 잃은 것은 아니다. 거센 파도에 밀려 조금 돌아가고 있을 뿐. 그러니 생각의 유연함으로 바다를 이해하고, 견고한 내면의 돛대에 몸을 묶은 채 계속해서 노를 저어 가기를.
당신의 항해도, 나의 기다림과 여정도 여전히 현재에도 흐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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