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블로그로 시작한 나의 블로그가, 인문 사회학의 블로그가 되는 것 같아 아쉽다. 기술적 문제 해결의 기록을 남기었으면 하는 사람들에게 미안함을 남긴다. 기술 블로그를 읽고, 기술적인 이야기를 양분삼아 문제를 해결하는 시대보다는, Gemini 나 ChatGPT 혹은 Cursor 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개발자의 역할이 되어버렸으니까.
내 기술적인 기여는 나의 github 에서 확인해주길 바란다
salieri009 - Overview
Ah! Thank you for deciding to see my humble GitHub. I am still a student I do not know how and what will be in the future. We will see! Thanks! - salieri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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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번 글의 포스팅은
에 이어서 글을 쓰고자 한다
저번 포스팅의 끝마무리에서, 나의 세계관과 두려움을 이야기 하다가 그 깊이가 너무 깊어진 나머지, 나도 모르게 쏟아낸 것 같은데. 그 두려움의 근원을 파악하기 위해 여럿 레이어로 나눠 생각해볼려고 한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시야가 단단하고 안정적이라고 믿으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 견고해 보이는 마음의 이면에는, 미처 돌보지 못한 스스로의 결핍과 불안이 숨어 있기도 하다. 우리는 종종 내가 건넨 작은 배려가 타인에게도 온전한 빛으로 닿기를 바라지만, 때로는 그것이 내 마음의 크기에 맞춘 서툰 기대치일 때가 있다. 사람은 자신이 본 만큼만 세상을 이해하고, 자신이 아파본 깊이만큼만 타인의 고통을 가늠할 수 있다. 그러니 내가 건넨 온기가 상대에게는 전혀 다른 온도로 도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 쉽게 망각한다.
출발선이 다르고 살아온 풍경의 결이 완전히 다른 누군가에게, 나의 잣대만을 기준 삼아 이해를 바라는 것은 어쩌면 작고 슬픈 폭력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칼날을 들이밀어 상처를 내는 방식이 아니라, 따뜻한 얼굴로 다가와 "왜 너는 나처럼 느끼지 못하느냐"고 묻는, 훨씬 더 깊고 오래 남는 종류의 상처다. 진정한 공감이란 같은 깊이의 밤을 지새워 본 사람들만이 닿을 수 있는 고요한 영역이거늘, 세상은 점차 타인의 깊은 어둠을 가늠할 여유를 잃어가고 있다. 눈에 보이는 짧은 파편들만으로 한 사람의 거대한 우주를 다 안다고 믿는 시선들이 거리마다 부딪히고, 그 충돌 속에서 아무도 다치지 않은 척 각자의 길을 간다.
나는 나뭇잎에 맺힌 빗방울의 미세한 떨림조차 온몸으로 감각하는 사람이다. 누군가의 목소리 끝에 실린 피로감, 억지로 끌어올린 웃음 뒤에 감춰진 공백, 말하지 않은 문장들이 허공에 남기는 묵직한 잔향—그런 것들이 내게는 선명하게, 때로는 너무도 선명하게 들려온다. 내 안에는 세상을 향해 기꺼이 쏟아내고 싶은 다정한 애정이 가득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맑고 연약한 결을 온전히 지켜내기 위해 나는 내면의 호수 주변에 조용히 울타리를 친다. 누군가 무심코 던진 조그만 조약돌 하나조차 나의 투명한 수면을 통과하는 순간, 온 마음을 뒤집어엎는 거대한 해일이 되어 나를 덮쳐오기 때문이다. 파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수면이 잠잠해진 것처럼 보여도, 그 진동은 호수 바닥 깊은 곳에서 오래도록 울린다.
그래서 나는 내가 온전히 품어낼 수 있는 파동들만을 조심스레 곁에 둔다. 이것은 세상을 향한 냉혹함이나 단절이 아니라, 너무 얇은 피부를 가진 이가 세상의 모든 거친 바람으로부터 스스로를 잃지 않으려는 고단하고도 절실한 생존 방식이다. 너무 맑은 렌즈를 가졌기에, 때로는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시야를 좁혀야만 이 흔들리는 세상 위에 겨우 서 있을 수 있다. 스스로를 지킨다는 것이 때로는 이토록 쓸쓸한 방어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섬세한 사람들은 안다. 말하지 않아도, 설명하지 않아도, 뼈저리게 안다.
이토록 치열하게 감각의 문을 여닫으며, 내가 아스라한 벼랑 끝에서 끝끝내 지키고자 하는 단 하나의 가치는 다름 아닌 '용서'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이 시대는, 용서가 가진 따스한 미학을 잊어가고 있는 듯하다. 누군가의 실수나 아픔을 보듬기보다는, 날 선 단어들로 상처를 덧내고 쉽게 등을 돌려버리는 차가운 계절이 길어지고 있다.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다시 일어설 힘을 주었던 아량의 자리에, 이제는 각자의 상처만이 가장 아프다며 서로를 밀어내는 방어기제들이 피어난다. 아픔은 공유되지 않고 경쟁한다. 누가 더 깊이 다쳤는지를 겨루는 싸움 속에서, 정작 서로의 손을 잡아야 할 순간들이 소리 없이 흘러가버린다.
상처받았다는 사실이 때로는 타인을 향한 가시가 되어 찌르고, 아픔의 크기를 겨루며 서로에게 닿지 못하는 목소리들만이 공허하게 맴돈다. 진정으로 들여다보아야 할 내면의 그림자는 외면한 채, 세상의 차가움만을 탓하며 고립을 자처하는 풍경들을 마주할 때면 가슴 한구석이 텅 빈 것처럼 서늘해진다. 모두가 아프다고 말하지만, 그 누구의 아픔도 진정으로 위로받지 못하는 쓸쓸한 아이러니 속에서 우리는 길을 잃어가고 있다. 위로의 말들은 넘쳐흐르는데, 정작 위로받았다고 느끼는 사람은 드물다. 언어는 풍요롭고, 마음은 메말라가는 이 역설이 시대의 얼굴이 되어버렸다.
나는 이 메마르고 스산한 풍경 앞에서 깊은 두려움과 먹먹함을 느낀다. 서로를 향한 섣부른 재단과 오해가 눈보라처럼 몰아치는 세상 속에서, 나의 맑고 예민한 세계가 얼어붙지 않도록 나는 오늘도 조용히 마음의 문을 닫아건다. 하지만 문을 닫으면서도 나는 안다—이 고요가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사람은 결국 사람에게로 향하게 되어 있고, 그것이 때로는 상처의 원인이 될지라도, 우리는 서로를 향해 기어코 손을 뻗고 만다는 것을.
그러나 나의 이 고요한 단절은 결코 세상을 향한 영원한 외면이 아니다. 언젠가 진짜 온기가 필요한 이들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시야를 투명하게 닦아두는 일이며, 인간이 인간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숭고한 가치인 '용서와 이해'의 작은 불씨를 내 안에서 영원히 꺼뜨리지 않기 위한, 나만의 아프고도 치열한 파수(把守)다. 이 불씨 하나를 지키기 위해 나는 오늘도 바람을 등지고 선다. 세상이 아무리 차가운 입김을 불어와도, 두 손을 오므려 불꽃을 감싸 쥔 채, 그것이 꺼지지 않도록. 단 한 사람에게라도 닿을 수 있도록. 그 하나의 가능성만으로도, 나는 오늘의 이 고단한 파수를 기꺼이 감당한다.
우리는 더 이상 명예와 인간의 존엄을 쫓으며, 올바른 가치를 찾고 위대한 희생에 대한 공헌을 하지 않는다. 약자의 대한 사랑이 잘 못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사회의 방향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자신이 직접 나서서 이야기하지 못할 말들을 다른 누군가가 하기를 원하고, 그 말을 다른 누군가가 하였을때. 그 사람에게도 "그 말을 해서는 아니되는 말이었다" 라고 말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 사람을 지지한다. 심지어, 본인이 피해를 본 대상이 아니라 제 3자에게, 그러니까 대중과 권위자에게 말을 하는 문화를 갖고 있게 되었다.
그러니 세상에는 서로의 상처를 스스로가 해결하는 마음 보다는, 공공장소에 흝뿌린다. 과거에는 강인함이나 성취가 자랑거리였다면, 이제는 '내가 얼마나 더 예민하게 상처받는 약자인가'를 증명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서는 방법이 되어 인간이 나아가야할 길을 막는다. 3자의 동정을 끌어내어 자신을 지지하게 만들고,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집단적으로 고발하고 사회적으로 매장하는 것이 보편적 규범이 된 것이 나는 우려 스럽다.
작은 어려움 앞에서도 "나는 상처받았으니 세상이, 시스템이 해결해 줘야 한다"며 타인과 권위에 의존하는 유약한 개인들을 양산한다. 모두가 사소한 일에도 자신이 피해자라고 목소리를 높이게 되면, 정작 사회의 구조적 모순으로 인해 고통받는 진짜 약자들의 목소리가 묻혀버리는 역설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채. 그저 목소리가 크고 소셜 미디어를 잘 활용하는 이들이 진짜 약자의 자리를 빼앗아 버린다.
얼마나 기만적인 일인가. 전쟁의 끔찍한 상처를 안고 돌아온 참전 용사들의 찢겨진 삶을 대변하던 'PTSD(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라는 단어의 무거운 핏빛 무게는 휘발되고, 이제는 일상의 사소한 스트레스나 민망함을 과장하는 보편적인 유행어가 되어버렸다.
어디 이뿐인가. 타인의 정신을 교묘하게 지배하고 파괴하는 지독한 심리적 학대였던 '가스라이팅(Gaslighting)'은, 이제 그저 내 의견에 동의하지 않거나 나에게 조금이라도 쓴소리를 하는 상대를 방어하고 공격하는 얄팍한 방패로 전락했다. 영혼이 부서지는 고통 속에서 피를 토하듯 외치던 '트라우마(Trauma)'는 일상적인 실패나 불쾌감을 포장하는 흔한 핑곗거리로 소비된다. 숨이 멎을 듯한 공포와 생사의 갈림길에서 사투를 벌여야 하는 '공황(Panic)'마저도, 순간적인 당황스러움을 부풀려 타인의 동정을 끌어내는 도구로 가볍게 쓰이고 있지 않은가.
진짜 고통의 언어들이 이렇게 도둑맞고 오남용될 때, 정작 그 단어가 아니면 자신의 상처를 설명할 길 없는 '진짜 피해자'들은 또다시 침묵할 수밖에 없다. 고통을 나타내는 언어의 극심한 인플레이션은, 결국 타인의 고통을 가늠하는 우리의 공감 능력을 파산에 이르게 만든다. 모두가 쉽게 상처받았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세상에서, 진짜 상처는 역설적으로 철저히 소외되며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그렇기에 나는 두려운 것이다. 용서의 가치도, 상처의 아픔도 사라지고 있는 지금이
나는 상처가 많아지는 것을 연민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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