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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꾼::호밀밭

@Salieri2026. 3. 9. 22:02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타인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그것이 타인을 자기 자신의 출발선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높이에서 다른 역할선을 찾아주는 것이니."

J.D. 샐린저의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주인공 홀든 콜필드는 끊임없이 세상과 불화한다. 기성세대는 명문 학교의 규율과 세속적 성공이라는 잣대로 그를 '낙제생'이자 '문제아'로 규정한다. 하지만 홀든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그들이 강요하는 트랙을 달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드넓은 호밀밭 벼랑 끝에 서서, 맹목적으로 달려오는 아이들이 낭떠러지로 떨어지지 않게 붙잡아주는 '파수꾼'이 되고 싶었을 뿐이다.

 

우리는 흔히 누군가를 이해한다고 말할 때 '역지사지'를 떠올린다. 하지만 내 안경을 낀 채 상대를 평가하는 시도는 종종 폭력이 된다. 진정한 이해란 '나라면 어땠을까'를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그 사람이 애초에 서 있는 지면의 높이와 향하는 방향이 완전히 다름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 본질적인 인간관계의 철학을, 나는 지금 생각한다.

그리고 두렵다. 

 

 

 

원점의 착각 (The Illusion of the Origin)

너는 지금, 어디서 어디를 보고 있는가 ?

 

우리가 타인을 바라볼 때 범하는 가장 큰 오류는, 세상의 모든 궤적이 나의 원점 $(0, 0)$에서 시작되었다고 믿는 것이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2차원 평면(가령 X축을 시간, Y축을 사회적 성취라 하자) 위에 나와 타인을 올려놓고 비교한다. 홀든의 학교 선생들이 그랬듯, 내 원점에서 출발한 선명한 궤적에 비추어 내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타인을 '뒤처졌다'라고 쉽게 재단한다.

 

하지만 인간의 삶은 평면 위의 스칼라(Scalar) 값이 아니다. 진짜 삶의 공간에는 Z 축(Context: 타고난 환경, 상실의 경험, 짊어진 무게)'이라는 고도가 존재한다. 홀든에게는 동생 앨리의 죽음이라는 깊고 무거운 Z 축이 있었다. 진정한 이해는 타인이 나와 같은 평면의 원점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Z축의 높이에서 출발했음을 뼈저리게 인정하는 것이다. 그는 $(0,0)$이 아니라 $(x, y, z)$라는 자신만의 고유한 좌표에서 삶을 시작했다.

 

자기 자신의 출발선에서 타인을 평가하려는 시도는 애초에 성립할 수 없는 수학적 오류다.

 

 

삶은 멈춰 있는 점이 아니라 움직이는 선, 즉 방향과 크기를 가진 벡터(Vector)의 궤적(Trajectory)이다.

 

나의 좌표계라는 잣대로 타인을 보면, 상대방은 엉뚱한 곳을 향해 헤매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세상의 Y축(세속적 성공, 명문대 진학) 기준으로는 홀든의 벡터가 한없이 작고 초라해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철저히 '상대적인' 착시일 뿐이다. 타인의 벡터를 분해해 보면, 나의 Y축 값은 작을지언정 나에게는 없는 다른 축(예컨대 순수함에 대한 갈망, 타인의 고통에 대한 예민한 공감 능력 등)을 향해서는 나보다 훨씬 강력하게 뻗어나가고 있을 수 있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나 궤적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자신의 독립적인 벡터를 가지고 우주 공간에 어떤 고유한 '역할선(파수꾼)'을 그리고 있는지, 그 상대적인 방향성을 찾아내고 인정해 주는 일이다.

기저 변환 (Basis Transformation): 세계관의 이동

그렇다면 어떻게 타인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수학에서는 내 기준이 아닌 다른 기준으로 공간을 재해석할 때 '기저 변환(Change of Basis)'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나의 축(Axis)을 기준으로 세상을 보던 것을 멈추고, 상대방의 시선이 기준이 되는 완전히 새로운 좌표계로 잠시 나의 세계관을 이동시키는 것이다.

내 안경을 벗고 타인의 고유한 기저(Basis)로 현상을 다시 계산해 볼 때, 비로소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내 기준에서는 반항적이고 굽어 보이던 홀든의 궤적이, 그의 좌표계 안에서는 아이들의 순수함을 지키기 위한 가장 논리적이고 숭고한 '역할선'이었음이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가 이토록 치열하게 타인의 좌표계를 이해하려 노력해야 하는 이유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이 모든 다차원적인 이해의 과정을 거세하고 있기 때문이다.

 

직접 마주하여 대화하지 않은 채, 스마트폰이라는 작은 창 너머로 보이는 잠깐의 단면과 숫자, 데이터만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섣불리 재단하는 시대다. 나는 작은 창으로 정제된 정보만을 믿고 그것으로 세상을 판단하는 이 시대의 얄팍함과 인간 가치의 상실이 진심으로 두렵다.

 

스스로 치열하게 사고하고, 자신의 가치를 정립하며, 곁에 있는 타인을 보살피고 사랑하는 것은 우리를 가장 '우리답게' 만드는 고유한 가치였다. 하지만 오늘날 기술은 우리를 기계적으로 닮아가며, 복잡하고 입체적인 타인의 삶을 매끄럽게 정제된 1차원적 정보로 요약해 버린다.

 

이러한 기술의 편리함은 역설적으로 치명적인 상실을 동반한다. 타인과 직접 부딪히고, 오해하고, 그 지난한 기저 변환의 과정 속에서 무언가를 깨달아 전혀 다른 아름다운 결과를 낼 수도 있었던 인간관계의 위대한 '가능성'의 프레임을 잊게 만드는 것이다. 알고리즘은 타인을 수치화할 뿐, 그들이 겪어낸 Z축의 깊이나 벡터의 치열함은 결코 보여주지 않는다.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위한다는 것. 그것은 내 출발선의 잣대를 내려놓고, 타인이 서 있는 고도를 살피며,

그가 그만의 기저 위에서 그려 나가는 고유한 역할선을 묵묵히 지켜봐 주는 것이다. 

 


 

 

결어

나는 두렵다. 배우면 배울수록 두려움이 커진다. 이 두려움의 근원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외부의 무언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눈에 보이는 가치들에 내 스스로가 깊이 감응하고 흔들리는 모습 그 자체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 두려움을 섣불리 타인에게 보여줄 필요는 없다. 그것은 또 다른 공포를 전염시키는 일이며 결코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나의 두려움을 타인에게 내보이는 것은, 스스로 짊어져야 할 책임을 떠넘김으로써 도리어 그 감정의 크기를 배로 부풀리는 행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혹자는 자신의 두려움과 상처를 다른 이와 나누면 나아진다고 위로하지만, 나는 그것이 정서적인 유약함의 토대를 늘리는 병리적 현상이라 생각한다. 타인의 좌표계를 온전히 이해하려 분투하는 것과, 나의 좌표계가 흔들리는 두려움을 타인에게 의존하여 해결하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다.

 

스스로 사고하고 가치를 정립하는 고독한 직시의 과정만이 인간을 참으로 단단하게 만들 수 있다.

 

 

++

글을 쓸 때마다 나는 내 감정의 심연으로 내려간다. 작은 글자 하나하나에 담긴 의미를 보살피며, 그 이면에 얽혀 있는 내밀한 경험과 생각의 가치를 꺼내어 활자로 연결한다. 무엇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 왔는지 철저하게 몰입하여 묘사한다. 그리고 그 깊은 몰입의 끝에서 항상 마주하는 감정의 잔상은, 다름 아닌 '두려움'이다.

 

그것은 근원적인 두려움이다. 뼈까지 스미는, 숨을 틀어막는 두려움. 인간다운 가치가 상실되고, 우리가 사랑했던 것들이 스러져가고 있다는 정신적인 감응—그것은 단순한 감각이 아니라 온몸으로 받아내는 충격이다. 내 안의 가능성을 보면서도 동시에 걷잡을 수 없이 변화해 가는 나 자신의 가치를 목도하는 서늘함. 배우면 배울수록 두려움은 더 커진다. 더 선명해진다. 더 잔인해진다. 이 두려움의 연원은 통제 불가능한 외부가 아니라, 새롭게 눈에 보이는 가치들에 내 스스로가 깊이 감응하고 흔들리는 모습 그 자체에 있다. 내가 나를 무너뜨리고 있다는 자각. 그 자각이 또 다른 무너짐을 부른다.

 

이 두려움을 수백, 수천, 수만 번 이야기해 보아도 직접 겪어보지 않은 이들은 결코 공감하지 못한다. 그것이 또 하나의 상처다. 애초에 우리는 같은 곳을 보고 있지 않았다. 같은 것을 보라 외쳐도, 돌아오는 것은 그저 자신들이 보는 것을 나 역시 보아주길 강요하는 이기적인 욕망뿐이었다. 나는 이해받으려 목을 놓아 울었고, 그들은 내 울음의 방향이 틀렸다고 정정해 주었다. 무관심한 타인들이 나라는 개인을 함부로 재단하는 것도 숱하게 보았다. 어디까지나 그들의 얄팍한 판단일 뿐이니 괘념치 않는다—고 말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괘념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데만 수년이 걸렸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이 두려운 감정에 대한 값싼 위로가 아니다. 알량한 해결책을 구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이 끔찍하고도 명징한 감정을, 당신들도 두 눈을 뜨고 똑똑히 직시하기를 바랄 뿐이다. 눈을 감지 마라. 고개를 돌리지 마라. 이것은 실재한다.

 

내가 진정 두려운 것은 단지 인간으로서의 가치 상실에 그치지 않는다. 한국이 한국답게 존재하게 했던 고유한 전통적 가치와 존중이 처참하게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이미 죽었는지도 모른다. 시대의 속도에 맞춰 기민하게 변하고 적응하고 있다지만, 그 이면에서 우리의 뿌리가 너무나도 빠르게, 소리도 없이, 썩어 들어가고 있지 않나 나는 생각한다

 

이것은 돌멩이 몇 개가 굴러 떨어지는 현상이 아니다. 처음에는 작은 돌 하나가 제자리를 잃는다. 아무도 듣지 못할 만큼 작은 소리로. 그다음엔 그 돌이 빠진 자리에 물이 스민다. 물은 소리 없이 스며들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천천히 속을 파먹는다. 사람들은 겉에서는 여전히 단단해 보이는 그 표면을 두드리며 안심한다. 그러다 어느 날, 발을 디뎠을 때 땅이 꺼진다. 발목까지, 무릎까지, 허리까지. 이것은 삶의 중심을 지탱하던 토대의 무너짐이다. 한 번에 쏟아지는 것이 아니기에 더 공포스럽다. 매일 밤 조금씩, 아무도 모르게, 발밑이 꺼져 들어간다. 견고하게 짜여 있던 우리의 가치관이 붕괴하고 있다. 세상을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겪고 판단하는 대신, 스스로에게 서열의 목줄을 채운다. 그 목줄을 채운 손이 다름 아닌 자신의 손이라는 것조차 느끼지 못한 채. 인간의 찬란한 가능성을 제 손으로 차단하고, 자신과 '동급'이라 여겨지는 이들하고만 얄팍한 섬을 쌓아 올린다. 그 섬은 점점 좁아지고, 그 위에 선 사람들은 점점 더 외로워지는데도.

 

나는 이들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가슴이 찢어진다. 타인을 품어내던 용서의 가치를 망각하고, 인간관계의 가능성을 스스로 단절해 버리는 작금의 사태에 전율할 뿐이다. 나무 한 그루가 바스러지는 것이 아니라, 숲을 품은 땅 전체가 썩어가고 있다. 그 썩은 땅 위에서 어린아이들은 더 이상 빛나는 가능성을 올려다보지 않는다. 올려다볼 수 있다는 사실조차 배운 적이 없다. 차가운 현실의 바닥만을 내려다본다. 그 눈빛에서 나는 내가 잃어버린 것을 본다. 아직 잃기 전의 나를 본다.

 

합리주의자를 자처하는 속칭 '어른'들은—나를 포함하여—아이들의 미래와 가능성을 보듬을 여유조차 상실했다. 아니, 여유가 없는 것이 아니다. 두려운 것이다. 가능성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순간, 자신이 그 가능성을 어디쯤에서 포기했는지가 드러나기 때문에. 이미 경쟁이 당연하다는 폭력적인 전제에 속박된 채, 그 잣대로 쉴 새 없이 아이들을 재단한다. 그러니 차이는 곧 차별이라는 날 선 무기가 되고, 정작 차별이 아닌 것조차 차별이라 부르짖는 무의미하고 공허한 단어들의 남발만이 세상을 뒤덮고 있다. 언어가 타락하면 사유도 타락한다. 사유가 타락하면 인간도 타락한다. 우리는 지금 그 연쇄의 한복판에 서 있다.

 

그러나 내 두려움과 상처를 섣불리 타인에게 기대어 위로받으려 하지 않겠다. 그것은 정서적인 유약함의 토대를 늘리는 병리적 현상일 뿐,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으며 도리어 감정의 크기를 배로 부풀리는 도피일 뿐이다. 타인의 좌표계를 온전히 이해하려 분투하는 것과, 나의 좌표계가 흔들리는 두려움을 타인에게 의존하여 덮으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혼자 이 두려움 앞에 선다. 도망치지 않고, 위로받으려 하지 않고, 다만 눈을 뜨고 바라본다. 이 두려움이 나를 부수기 전에 내가 먼저 이 두려움의 얼굴을 기억해 두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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