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쓴다는 것은, 나의 생각을 깊은 곳에서 꺼내서 정리하는 것을 말한다. 내가 보는 세상을, 그리고 내가 보는 사유를, 최대한 감각적으로 꺼내 그것을 분해해 "나"라는 사람을 아끼는 방법이다. "나"를 아낀다는 것은 바로 나를 객관적으로 보고 그리고 내가 "좋다" 생각하는 것을 "좋다" 라고 말할 줄 아는 것이다. 내가 만일, 내가 좋아한다는 것을 "좋아한다" 라고 말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나를 아끼는 것을 못하는 것을 넘어, 나라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다.
글을 쓰는 현재 시각은 2026년 02월 18일, 아침 7시 54분을 지나고 있다. 이 글의 기본 토대는 어제 핸드폰 하면서 햇다

나의 사유는 동양철학의 토양 위에 서 있다. 그것은 단순히 학문적 선택이 아니라, 사실 선택 당한 것이 크다. 과거 대학교에서 1학년에는 동양철학을 배우며 만물의 공명과 비례와 조화를 배웠다. 공자가 말한 인(仁)—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완성되는 인간성—과 노자가 제시한 도(道)—억지스러움 없이 흐르는 자연의 이치—는 나에게 세상을 읽는 최초의 언어가 되었다.
시대를 거치며 다듬어진 유가의 중심 철학 중에서도, 나는 특히 중용(中庸)과 무위(無爲) 에 깊은 공명을 느낀다. 중용은 치우치지 않는 균형이지만, 그것은 수동적 중립이 아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매 순간 적절한 지점을 찾아가는 역동적 조화다. 무위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아니라, 억지로 개입하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러운 흐름을 따라 가장 큰 효과를 내는 행위의 예술이다
.
이 두 가지 개념은 나에게 단순한 철학적 명제를 넘어선 실천적 도구다. 과도하게 닫힌 세상을 유연하게 열어젖히고, 무분별하게 열린 세상에 적절한 경계를 세워 중심을 잡게 한다. 이는 흑백논리로 세상을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의 결을 읽고 그에 맞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마치 물이 그릇에 따라 형태를 바꾸되 본질은 잃지 않는 것처럼.
나의 길, 또 다른 토대를 쌓다
이러한 동양적 세계관 위에, 나는 유학의 길 속에서 서양철학이라는 분석의 틀을 얹었다. 서양철학은 인간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정의하려 노력한다. 데카르트의 명증성, 칸트의 범주, 헤겔의 변증법, 이들은 복잡한 현상을 명료하게 해부하는 강력한 도구다. 서양 철학의 힘은 모호함을 거부하고 명확성을 추구하는 데 있다. 프로그래밍이라는 개발자의 길을 걸은 이후로, 이것은 필연적인 일 것이다.
그러나 사회라는 거대한 관계망 속에 얽혀 살아가는 우리에게,
단지 대상을 '객관적'으로 분리해 보는 것만으로는 삶의 해답을 찾을 수 없다.
인간은 진공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항상 이미 관계 안에 던져져 있고, 그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얻는다. 하이데거가 말한 '세계-내-존재(Being-in-the-world)'처럼, 우리는 세상과 분리될 수 없다. 우리를 둘러싼 맥락, 역사, 문화, 관계가 우리 존재의 일부를 구성한다.
더욱이 우리가 마주하는 수많은 문제는 종종 그 자체가 본질이 아니라, 다른 깊은 곳에서 기인한 하나의 표식(Index)일 뿐이다. 빙산의 일각처럼, 우리 눈에 보이는 문제 아래에는 훨씬 더 광대하고 복잡한 뿌리가 숨어 있다. 분노는 상처의 표식이고, 회피는 두려움의 표식이며, 집착은 상실에 대한 불안의 표식이다. 중독은 공허함의 표식이고, 완벽주의는 자기 가치에 대한 불확실성의 표식이다.
눈앞에 드러난 현상만 해결하려 드는 것은 근본적인 치유가 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연기가 나는 곳만 끄고 불씨는 그대로 두는 것과 같다. 증상만 억제하고 원인은 방치하는 것이다. 서양의 이성이 표식을 명료하게 분석하는 데 유용하다면, 동양의 지혜는 그 표식이 가리키는 보이지 않는 뿌리와 관계를 더듬어가는 데 탁월하다.
서양철학이 '무엇(What)'과 '어떻게(How)'를 묻는다면, 동양철학은 '왜(Why)'와 '어디서부터(Whence)'를 묻는다. 전자가 구조를 드러낸다면, 후자는 의미를 탐색한다. 나는 이 두 가지를 통해 세상의 이면을 입체적으로 읽어내려 한다. 한 눈으로는 명료하게 분석하고, 다른 눈으로는 맥락을 더듬어간다.
물론, 나의 이러한 가치가 타인에게도 똑같이 중요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각자는 자신만의 역사와 상처, 희망과 두려움을 안고 살아간다. 그 고유한 맥락 속에서 형성된 가치관은 다른 누군가의 것과 완벽히 일치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문제가 아니라 풍요로움이다. 세상은 다양성으로 인해 더 아름답고, 다른 관점들의 충돌과 조화를 통해 진화한다.
다만 누군가에게 나는 '규격 외의 인물', 혹은 이해하기 힘든 '특이한 사람'으로 비칠지도 모른다.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들—균형, 맥락, 관계의 입체성, 표식 너머의 뿌리 찾기—은 빠른 판단과 명확한 답을 선호하는 현대 사회에서 종종 비효율적이거나 우유부단해 보일 수 있다.
'회색지대'를 탐색하는 태도는 흑백논리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혼란스럽거나 답답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래서 결론이 뭔데?"라는 질문을 받을 때, 나는 종종 답 대신 더 많은 질문을 던진다. 왜냐하면 상황에 따라 답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복잡성을 존중하는 것은 때로 우유부단함으로 오해받는다.
내 오랜 친구가 그랬던 것처럼.
Echo Chamber 에서 나가
그는 자신의 주변만으로 세상을 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보고 싶은 세상만 보았다. 그는 스스로 메아리실을 짓고, 그 안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였다. 반향실 안에서는 자신의 생각이 수백 번 메아리쳐 돌아온다. 그것은 마치 자신의 관점이 진리임을 확인시켜주는 합창처럼 들린다.
이는 단순히 폐쇄적 태도의 문제가 아니다. 반향실은 정교한 자기방어 메커니즘이다. 불확실성과 모호함, 자신의 신념에 도전하는 정보는 불안을 야기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기존 관점을 강화하는 정보만 선택적으로 수용한다. 심리학에서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라 부르는 현상이다. 우리는 자신이 옳다는 증거는 쉽게 받아들이지만, 자신이 틀렸다는 증거는 무시하거나 합리화한다.
그 닫힌 세계 속에서 규격을 벗어난 나의 사유는 '이상한 것', '비정상적인 것'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 규격—보이지 않지만 강력한, 사회적으로 승인된 '정상성'의 틀—에 자신을 맞추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을 전시하며, 다수 속에 섞여 안도감을 느꼈을지 모른다. 소셜 미디어 시대는 이런 현상을 극대화했다. '좋아요'의 개수로 자신의 가치를 측정하고, '팔로워'의 수로 영향력을 가늠한다. 큐레이션된 삶의 조각들만 전시하며, 실패와 취약함은 철저히 은폐한다.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하이라이트 릴을 만들고, 편집된 현실을 진짜 삶인 양 제시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페르소나는 점점 더 진짜 자신과 멀어진다. 가면을 쓰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게 되고, 어느 순간 가면이 얼굴에 붙어버린다.
하지만 나는 그의 뒷모습에서 짙은 그림자를 본다.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 보여준다는 것은, 보여주고 싶지 않은 진짜 자신을 철저히 고립시킨다는 뜻이다. 페르소나와 그림자—융(Carl Jung)이 말한 이 두 측면은 하나의 전체다. 한쪽만 보이고 다른 쪽을 억압할 때, 억압된 부분은 더욱 어둡고 비대해진다.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어들 뿐이다. 그는 수많은 사람 속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동시에 철저히 혼자였다. 그 어떤 관계도 진정한 의미에서 '만남'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진정한 만남은 취약함을 드러낼 수 있을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마틴 부버(Martin Buber)가 말한 '나-너(I-Thou)' 관계가 아닌, '나-그것(I-It)' 관계만이 가능했다.
타인은 자신의 이미지를 확인받기 위한 거울일 뿐, 독립적 존재로서 만나지지 않았다. 진정한 대화는 없고, 교차하는 독백만 있었다. 상대방의 말을 듣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할 말을 기다리며 그저 침묵할 뿐이었다.
스스로 만든 세상에 갇혀 가능성을 닫아버린 그는, 자신이 외롭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알고 있었지만 인정하지 않으려 했을 수도 있다. 외로움을 인정하는 것은 자신의 전략이 실패했음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만든 안전지대가 실은 감옥임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반향실의 가장 잔인한 역설이다. 가장 많이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는 순간, 우리는 가장 고립되어 있다. 수백 개의 '친구'를 가지고 있지만 진정한 친구는 없다. 끊임없이 소통하지만 진짜 대화는 없다. 계속 말하지만 듣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그 어느 때보다 외롭다.
내가 입체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보려 애쓰는 이유는 결국 이런 안타까움 때문이다. 그 시야를 돌려, 나는 플라톤의 동굴 비유를 떠올린다. 동굴 속 사람들은 평생 그림자만 보며 그것이 실체라 믿는다. 그들은 불행하지 않다. 오히려 자신들의 세계에 만족한다. 그림자 세계는 익숙하고, 예측 가능하며, 안전하다. 문제는 그들이 다른 가능성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앞만 보고 달리는 그가, 마치 동굴 속 사람들처럼 그림자를 실체라 믿으며 보지 못하는 것. 그 화려한 규격 뒤에 숨겨진 공허와 단절이 내 눈에는 너무나 선명하게 밟힌다. 성공의 외양, 인정받는 이미지, 사회적 지위—이 모든 것이 그림자다. 진짜 자아, 진정한 관계, 의미 있는 삶—이것이 실체다.
하지만 그에게 이것을 말한다고 해서 그가 곧바로 이해하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동굴에서 나온 사람이 다시 들어가 진실을 말할 때, 동굴 속 사람들은 그를 미쳤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그가 말하는 세계는 그들의 경험과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림자 세계에 완벽히 적응했고, 그 적응은 생존 전략이 되었다. 새로운 진실은 위협이다. 그것은 자신들의 전체 세계관을 무너뜨릴 수 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동굴을 나가는 과정이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처음 빛을 마주하면 눈이 부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익숙한 어둠이 오히려 편안하다.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려면 기존의 모든 믿음을 재검토해야 한다. 자신이 알았던 모든 것이 불완전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는 자아의 일부가 죽는 경험이다. 자아의 의미적 자살이다.
변화는 언제나 상실을 수반한다. 새로운 것을 얻기 위해서는 익숙한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확실한 더 나은 미래보다 확실한 불만족스러운 현재를 선택한다.
다른 길, 더 나은 길이 아닌
나의 철학이 그보다 우월해서가 아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싶다. 나는 어떤 도덕적 고지에 서 있지 않다. 나의 방식이 유일한 올바른 방식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독단이 될 것이다. 또 다른 반향실을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또 다른 지배의 언어를 말 하게 될 것이다.
오히려 나는 끊임없이 의심한다. 내가 보는 것이 정말 진실인가?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의 관점 역시 한계와 편향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이런 질문들은 불편하지만 필수적이다. 확신은 편안하지만, 의심은 성장의 여지를 남긴다.
다만 나는 본다. 그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 그것이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단지 다른 각도에서 보게 할 뿐이다. 마치 산을 오르는 두 사람이 서로 다른 경로를 택한 것처럼. 어느 쪽이 더 좋은 길이라고 말할 수 없다. 단지 다른 풍경을 보게 될 뿐이다.
하지만 내가 보는 것은 그의 고통이다.
그가 의식하지 못하는 고통. 화려한 겉모습 뒤에 숨겨진 공허함. 수많은 연결 속에 감춰진 단절. 완벽한 이미지 아래 억압된 진짜 자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소비되는 에너지.이것을 보는 것은 특권이 아니라 책임이다. 모른 척할 수도 있다. 더 쉬울 것이다. 하지만 진정으로 누군가를 아낀다면, 그들의 편안한 거짓말보다 불편한 진실을 말해줄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그 진실을 받아들일지는 전적으로 그들의 선택이지만.
어쩌면 내 방식이 그에게 당장 해답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아마도 해답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다. 사람들은 준비되었을 때만 변화한다.
외부에서 아무리 강요해도, 내면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때로는 더 큰 고통을 겪어야만 변화의 필요성을 느낀다. 때로는 안전지대가 무너져야만 새로운 길을 찾는다.
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경계에 서 있을 것이다. 경계는 독특한 장소다. 두 세계가 만나는 곳이고, 양쪽을 모두 볼 수 있는 곳이다. 안과 밖, 익숙함과 낯섦, 안전과 모험이 공존하는 곳이다. 경계는 불편하다.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계는 가능성의 공간이기도 하다.
언젠가 그가 자신의 메아리실을 깨고 나올 때—그리고 나는 그 '언젠가'가 올 것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결국 진정성을 갈망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내가 거기 있기를 바란다.
"당신의 규격 밖에도 넓은 세상이 있고,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라고 말해줄 수 있는, 마음 쓰이는 관찰자로 남고 싶기 때문이다.
그것이 친구의 의미가 아닐까. 상대방이 보지 못할 때 대신 보아주고, 길을 잃었을 때 나침반이 되어주고, 어둠 속에 있을 때 빛을 비춰주는 것. 강요하거나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거기 있어주는 것. 그들이 준비되었을 때 손을 내밀 수 있도록. 이것은 , 내가 누군가에게 등대가 되어야 한다는 의지와 또 이어진다. 타인에게 올바른 길을 열어주길 원하며 :: 살리에리의 인생살이 채널
결어
입체적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은 끊임없는 노력을 요구한다.
편견과 싸우고, 익숙함에 저항하고, 불편한 질문을 던지고, 명확한 답이 없음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은 또한 외롭다. 다수의 의견에 쉽게 동조하지 않고, 유행하는 관점을 자동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집단의 압력에 저항할 때, 우리는 종종 혼자가 된다. 하지만 그것은 선택한 고독이다. 진정성을 위해 치르는 대가다.
동시에 그것은 풍요롭다. 세상은 훨씬 더 복잡하고, 아름답고, 신비롭고, 의미로 가득 차 있다. 단순한 이분법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뉘앙스와 결들이 있다. 모순들이 공존하고, 역설들이 진실을 품고 있으며, 회색지대에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입체적으로 산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산다는 것이다. 우리는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모순덩어리고, 복잡하고, 계속 변화하며, 완전히 이해될 수 없다. 우리 자신조차도. 그 복잡성을 인정하고, 타인의 복잡성을 존중하며, 세상의 복잡성 속에서 겸손하게 길을 찾아가는 것.
그것이 내가 선택한 삶의 방식이다. 완벽하지 않고, 때로 힘들며, 종종 외롭지만, 진정하다고 느끼는 유일한 방식이다. 그리고 나는 이 경계에서, 이 입체적 시선으로, 계속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려 노력하고, 그리고 무엇보다—타인과 진정으로 만나기를 시도할 것이다.
왜냐하면 결국, 우리가 이 복잡한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일은 서로를 진정으로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규격 너머를, 반향실 밖을, 그림자를 넘어 실체를 보는 것. 그리고 그렇게 서로를 보았을 때, 우리는 비로소 혼자가 아님을 깨닫는다.
부디, 친구여, 그러니, 모두에게 친절해 질려고 하지마라.
모두를 구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예수가 아닌이상
세상에 나와서, 세상을 직접 겪은 사람과 이야기를 듣고 세상을 보는 사람은 다르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보고, 스스로 해석하는 능력을 키워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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