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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사회의 가치란

@Salieri2026. 2. 16. 11:02

타인에게 올바른 길을 열어주길 원하며 :: 살리에리의 인생살이 채널

 

 

타인에게 올바른 길을 열어주길 원하며

나는 내 주변 사람들이 올바른 길을 가길 원한다. 그러나 그 올바름의 가치는 사회적인 방향성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내 의도와는 달리 행동하는 사람이 많아지기 마련이다. 시대에 따라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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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쓴다는 것은 나의 마음을 정리하고, 또한 내가 생각하는 것을 다듬어 필요한 정보와 불필요한 정보, 그리고 다른 사람의 오해와 더불어 이해를 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믿는 것이 항상 옳은 것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기도 하며, 지금 내가 생각하는 가치가 미래의 내가 생각하는 가치가 아닐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기록을 남기고, 그리고 누군가 읽어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 작게나마 위로의 가치를 남기고 싶은 것에 있다.
상처받은 청년들에게 잃지 말아야 하는 가치를 누군가는 기억해야 하기 때문에 

 

그렇기에 이번의 포스팅은, 저번에 포스팅한 반대의 방향성을 생각해 보자, 아니, 생각을 확장시켜 나의 관점을 사회로 투영해 보자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벗어나, 나라는 객체를 제3의 객관적인 시야를 위해 보기 위한 접근이다

 

 

 


 

 

 우리는 누구나 마음속에 자신만의 '자'를 하나씩 품고 산다. 그 자는 내가 살아온 경험, 내가 배운 도덕, 그리고 내가 믿는 신념으로 촘촘히 눈금이 매겨져 있다. 우리는 무의식 중에 이 자를 꺼내어 타인의 삶을 잰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살까?", "저건 비효율적이야.", "사회적으로 저건 옳지 않아." 나의 눈금에 딱 들어맞지 않는 타인의 삶은 종종 '틀린 것'이나 '교정해야 할 대상'으로 치부되곤 한다.

 

 

이 자의 존재는 자연스럽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기준을 필요로 한다

. 문제는 이 기준이 '나만의 것'이라는 사실을 망각할 때 시작된다.

 

우리는 자신의 자가 유일한 정답이며,

보편적 진리라고 착각한다. 그리고 그 착각은 원하던, 원치 않던 타인에 대한 폭력으로 이어진다.

 

타인의 가치를 내가 옳다고 믿는 가치로 재단하는 행위는, 엄밀히 말해 정신적인 폭력에 가깝다. 나의 옳음이 타인에게도 정답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말한다. "나는 그 사람을 위해서 충고하는 것뿐이야." 하지만 그 충고의 밑바닥에는 종종 이런 전제가 깔려 있다. '나의 방식이 더 나으니, 너도 나처럼 살아야 해.' 이것은 도움이 아니라 지배의 언어다. 

 

이러한 관점의 재단은 상대방의 자율성을 박탈한다. 그것은 상대를 하나의 독립된 주체가 아닌, 내 기준에 맞춰 수정되어야 할 미완성의 존재로 바라보는 시선이다. 타인을 '고쳐야 할 대상'으로 보는 순간, 우리는 그 사람이 지닌 고유한 이야기와 맥락을 지워버린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나의 서사를 덧씌운다. 그러면서, 그 선택이 자신의 선택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희생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예를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안정적인 직장을 포기하고 예술가의 길을 택했다고 하자. 사회는 묻는다. "그게 먹고살 수 있는 일이야?" 하지만 그에게 예술은 단순한 직업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유일한 방식이며, 숨 쉬는 것만큼이나 절실한 선택이다. 

 

우리가 그의 선택을 '비현실적'이라고 평가하는 순간,

우리는 그의 내면 깊숙이 흐르는 강물을 보지 못한 채 표면의 물결만 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모든 개인은 저마다의 우주를 가진다. 어떤 이에게는 안정이 최고의 가치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모험과 불안정이 삶의 동력이 된다.

누군가는 속도를 미덕으로 여기지만, 누군가는 멈춤을 신성시한다.

내가 가진 가치관은 나라는 사람을 지탱하는 기둥일 뿐, 그것이 타인의 지붕을 받치는 기둥이 될 수는 없다.

 

 우리의 실수는 이 우주들이 마치 동일한 법칙으로 작동한다고 가정하는 데서 비롯된다. 물리학에서 각각의 은하는 고유한 중력장을 갖는다. 마찬가지로 각 개인의 삶에도 고유한 중력이 존재한다. 어떤 이에게는 가족이 삶의 중심이지만, 다른 이에게는 독립과 자유가 가장 강력한 중력으로 작용한다. 그 중력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내 우주의 법칙으로 상대의 궤도를 평가하는 것은 근본적인 오류다. 

 

앞서 말했듯, 타인의 삶을 나의 잣대로 평가하고 재단하려 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의 고유한 서사를 지워버리는 실수를 범하게 된다. 한 사람의 선택 뒤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맥락이 존재한다. 유년 시절의 상처, 이루지 못한 꿈, 반복되는 실패와 작은 승리들, 그리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내면의 울림들.

 

이 모든 것이 얽히고설켜 하나의 선택을 만들어내고, 그 사람의 "개인"을 만들어낸다

 

더 나아가, 우리는 사회적인 가치와 개인의 가치가 충돌할 때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직면한다. 흔히 건강한 사회란 구성원들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사회라고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의문을 제기한다 

 

사회가 요구하는 보편적 가치와 한 개인의 삶의 궤적은 반드시 '평행'해야만 하는가?

 

그렇지 않다. 사회적인 가치와 개인의 가치는 평행하지 않을 수 있다. 때로는 비스듬히 엇갈리고, 때로는 정반대를 향하기도 한다. 사회가 '성공'이라 부르는 길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소박한 '만족'을 좇는 삶, 효율성이라는 사회적 합의 대신 느림과 여백을 선택한 삶들이 그러하다.

 

 그렇기에 현대 사회는 끊임없이 '생산성'을 요구한다. 더 빠르게, 더 많이, 더 효율적으로.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느리게 걷는 것이 유일한 생존 방식이다. 번아웃을 겪은 사람, 심리적 트라우마를 안고 사는 사람, 혹은 단순히 속도 경쟁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는 사람. 이들이 사회적 흐름과 평행하지 않다고 해서, 그 삶이 공동체에 해가 되거나 잘못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모든 선이 평행하게만 그어진다면, 그 사회는 아무런 무늬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밋밋한 캔버스에 불과할 것이다.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는 선들이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복잡한 무늬, 그것이 바로 건강한 공동체의 모습이다. 직선으로만 이루어진 그림은 단조롭지만, 곡선과 직선이, 수직과 수평이 어우러진 그림은 풍부하고 생동감 있다.

 

그렇기에 평행하지 않은 그 개인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단순히 '관용'을 베푸는 차원이 아니다. 이것은 공동체를 살아가는 개인이 마땅히 지켜야 할 '의무'이다. '공동체적인 의무'라고 하면 흔히 전체를 위해 개인을 희생하거나 규칙을 준수하는 것을 떠올린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공동체적 의무는, 나와 섞이지 않는 이질적인 존재를 나의 곁에 머물게 하는 인내심이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이해받질 못할 불 확실한 존재이기에 

 

이해할 수 없어도 인정하는 것, 동의할 수 없어도 존중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다양성이 숨 쉬는 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단단한 기둥이다. 우리는 종종 '다양성'을 추상적인 가치로만 여긴다. 하지만 다양성은 머릿속 이념이 아니라, 매일매일의 구체적인 태도에서 실현된다. 내 옆에 앉은 이의 삶의 방식이 나와 전혀 다를 때, 그것을 비난하지 않고 존중하는 것. 바로 그 순간에 다양성은 살아 숨 쉰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획일성을 강요한 사회는 결국 내부에서 무너졌다. 모든 구성원이 같은 생각, 같은 가치,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도록 강제한 사회는 외형적으로는 강해 보였지만, 내면은 취약했다.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고, 새로운 문제에 창의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반면 다양성을 허용한 사회는 유연했고, 회복력이 있었다. 서로 다른 목소리가 모여 새로운 해법을 만들어냈고, 예상치 못한 위기에도 살아남았다.

 

타인을 내 식대로 해석하려 하지 않는 절제, 그리고 사회의 속도와 다르게 걷는 이들을 불안한 눈빛 대신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 주는 여유. 이 태도들이 모일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된다. 하지만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타인을 재단하지 않는 것은 일종의 자기부정을 필요로 한다. 내가 옳다고 믿었던 것들을 상대화하고, 나의 경험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불확실성을 견디는 능력을 요구한다. 타인의 삶을 나의 기준으로 재단할 수 있다면, 세상은 명확하고 단순해 보인다.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이 분명히 나뉜다. 하지만 그 재단의 가위를 내려놓는 순간, 우리는 불편한 회색 제대로 들어간다. "저 사람의 선택이 나에게는 이해되지 않지만, 그에게는 최선일 수 있다." 이 불확실한 문장을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바로 이 불편함을 감수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성숙한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타인의 삶을 내 기준으로 재단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 자신의 확신을 조금 덜어내고 그 빈 공간에 타인의 이야기를 담을 여유를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나약함이 아니라, 오히려 강인함의 표현이다. 내 신념을 고수하면서도 타인의 신념을 존중할 수 있는 능력, 이것이야말로 정신적 근력이다.

 

이제, 나의 가치가 소중하듯 타인의 가치 또한 그에게는 절대적임을 인정하자. 우리가 서로의 삶을 재단하는 가위를 내려놓고, 그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응시할 때, 비로소 우리는 서로에게 안전한 이웃이 될 수 있다. 음악에서 불협화음은 때때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만들어낸다. 모든 음이 완벽한 조화를 이룰 때보다, 약간의 긴장과 어긋남이 있을 때 더 깊은 감동이 전해진다.

 

인간 사회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같은 리듬으로 움직이는 사회보다, 서로 다른 템포와 선율이 공존하는 사회가 더 풍요롭다. 어떤 이는 빠른 템포로, 어떤 이는 느린 템포로, 어떤 이는 왈츠를, 어떤 이는 블루스를 연주한다. 이 모든 소리가 함께 어우러질 때, 우리는 단순한 소음이 아닌 복잡하고 풍성한 심포니를 듣게 된다.

 

엇갈린 선들이 빚어내는 그 불협화음의 아름다움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이 복잡한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우리의 품격이자 의무이다. 우리는 모두 다른 방향을 향해 걷고 있지만, 같은 땅을 밟고 있다. 그 땅 위에서 서로의 발걸음을 존중하고, 각자의 속도를 인정하며, 때로는 교차하고 때로는 평행하게 걸어가는 것. 그것이 공동체의 본질이다.

 

결국 타인을 재단하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히 관대함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답게 살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내가 나의 자로 타인을 재단하지 않을 때, 타인도 나를 그들의 자로 재단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것은 단순한 호혜성을 넘어선, 상호 존중의 문화를 만들어낸다.

 

마음속의 자를 완전히 버릴 수는 없다. 우리는 기준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자가 나만의 것임을 기억하고,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는 지혜를 가질 수는 있다. 나의 자는 나를 가늠하는 도구일 뿐, 타인을 심판하는 무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각자의 우주를 존중하며, 평행하지 않은 삶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공간을 만들어갈 때, 비로소 우리는 단순한 개인들의 집합이 아닌 진정한 '공동체'가 된다. 그리고 그 공동체 속에서, 우리 각자는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된다.

 

결어

 이 글을 쓰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평소에 내가 믿는 나 자신 또한 짧지만 빠르게 다른 이들을 나만의 "자"로 재단하고 이야기를 듣지 않은 사람이기에,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 "내가 행동하는 것"의 차이를 객관적으로 분석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렇기에 생각의 깊이를 파내는 것을 중지하고, 그 생각에서 빠져나와 현저히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에는 평소의 노력보다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데에는 좋은 토대가 된다. 

 

나는 모차르트를 좋아한다 

 

그렇기에 더더욱 버즈 올드린을 좋아하고, 존 애덤스를 좋아한다, 모두가 스티브 잡스를 볼 때 나는 스티브 워즈니악을 볼 수밖에 없다. 좋아한다는 것은 결국 그 존재 자체가 "나와 다른 존재" 이기 때문이다. 이 맥락에서, "나와 다른 존재"가 아니라 나는 "나의 '자'가 가늠할수 없는 존재를 사랑하는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내가 거쳐간 모든 사랑하는 이들이, 어떤 방면에서는 나보다 더 나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여기서 기인한다. 

 

그들이 나와 닮았고, 그와 동시에 나와 너무나 달랏기에 나는 그들을 사랑했다

 

 

다시한번 내가 좋아하는 말로 글을 끝내고 싶다.

 

나는 불가능을 갈망하는 자들을 사랑한다

 

 

 

상처받은 모든이들이 다시한번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사랑하기를 기원한다.

Salieri
@Salieri :: 살리에리의 인생살이 채널

평소에 내가 좋아하는것과 싫어하는 것들 그리고 왜 안되나 싶은 것들을 업로드 하는 블로그입니다 인생살이도 업로드 하고있어요. 제가 걸어온 길이 당신에게 있어서 도움이 되는 이정표였으면 좋겠네요. 질문은 항상 넓은 마음으로 받고있답니다.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 아닌 이상 제에게 이메일을 써주세요 트위터 : https://twitter.com/@Salieri1845799 깃허브 : https://github.com/salieri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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