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사람을 담는 틀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내가 어디서 자라왔는지 보여주는 지문이기도 해. 내 한국어의 말투와 영어의 말투 그고 일본어의 단어 사용이 다르 다는 것을 발견할 때마다 나 스스로 웃음을 자아내기도 한다
서문
나는 이제 2개 국어를 해내는 사람이 되었다. 한국어를 통해 세상을 보던 내가 영어를 통해 세상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 것은 천운이었다고 생각한다. 번역이나 해석이라는 필터를 거치지 않고, 언어가 전달하는 감정의 무게와 순수성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러면서 동시에 내가 보는 세상이라는 것이 결국 '내가 어떤 언어로 무엇을 배우고 아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다.
내가 배운 한국어의 세상은 내가 살아온 삶을 대변한다. 모난 듯하면서도 사려 깊음이 담긴 단어 하나하나는, 내가 주변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여주는 거울이었다. 불우하지는 않았지만 꽤나 모났던 가정환경 속에서 내 소신을 올곧게 지켜온 나에게, 한국어의 화법은 때론 직설적으로 사람을 찌르는 언어였다. 물론 찌르는 것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제대로, 정확히 찌르는 것에도 사람을 향한 마음을 담을 수 있으니까.
그와 동시에, 나는 그만큼 감정을 부정당하며 살아온 사람이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올바르고 올곧게 나 자신을 통제하고 감정을 잘라내며 살아온 나에게, 감정에 마냥 솔직한 사람을 마주하는 일은 때로 깊은 역겨움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나의 애정 표현 역시 감히 직설적이고 감히 찌르듯이 다가가는 것이었기에, 내가 배워온 이 날 선 사랑의 언어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언어 그 자체가 주는 포근함을 원하는 사람들이었다. 언어의 힘은 곧 생각의 힘이요, 생각의 힘은 결국 나의 인생 전체를 보여주는 것이다.
본문
영어를 배우고, 말하고, 쓰는 일련의 과정은 단순히 낯선 소리와 문법을 익히는 물리적 훈련이 아니었다. 그것은 언어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하나의 세계관임을, 아니 더 정확히는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 그 자체임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긴 항복의 과정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듯 "내 언어의 한계가 곧 내 세계의 한계"라면, 두 언어의 경계를 넘나드는 행위는 곧 두 개의 세계 사이 어딘가에 위태롭게 서 있는 일이다. 그 간극에서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한 사람의 언어가 어떤 환경에서, 어떤 방식으로 빚어졌느냐에 따라 그가 바라보는 세계의 해상도가 근본적으로 달라진다는 사실을.
언어는 단지 생각을 옮기는 투명한 그릇이 아니다. 언어는 이미 특정한 방향으로 굴절되어 있는 렌즈다. 어떤 언어에는 존재하지만 다른 언어에는 존재하지 않는 단어들, 예컨대 포르투갈어의 'saudade', 한국어의 '한(恨)', 독일어의 'Weltschmerz' 같은 것들은 단순한 어휘의 공백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민족이 오랜 세월에 걸쳐 집단적으로 정련해낸 감정의 지층이며, 그 언어를 모르는 사람은 그 감정을 경험하더라도 정확하게 붙잡아두지 못한 채 그냥 흘려보내고 만다.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그러므로 단순히 새로운 어휘를 수집하는 일이 아니라,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세계의 결을 서서히 감각하게 되는 일이다.
두 가지 언어 사이의 구조적 차이를 넘나들다 보니, 기이하게도 언어 그 자체보다 '사람'이 먼저 투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화자가 무의식적으로 고르는 단어의 결, 문장과 문장 사이의 미세한 호흡, 그리고 그 밑바닥에 깔린 감정의 선율이 직감적으로 읽히는 것이다. 언어를 오래 들여다본 사람은 필연적으로 그 언어 너머에 있는 존재를 보게 된다. 이 사람이 지금 어떤 뉘앙스의 단어를 끌어와 자신의 복잡한 내면을 어떻게든 '통역'해내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지, 그 이면에 도사린 결핍이나 방어기제까지도.
말은 사람이 선택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말은 사람을 배신한다. 우리가 감추려는 것들이 오히려 말의 빈틈 사이로, 문장의 속도 사이로, 단어 선택의 미묘한 어색함 사이로 새어 나온다
.지난 2년 남짓한 시간 동안 타인의 감정을 언어라는 체에 밭쳐 번역해내는 일에 몰두한 결과,
나는 이 서글픈 초능력을 갖게 되었다. 초능력이라 이름 붙였지만 실은 저주에 가깝다.
텍스트와 말소리 이면에 숨겨진 사람의 진짜 의도를 매번 발라내고 짐작하는 작업은 뼛속까지 피곤한 일이다. 인간은 본래 불투명한 존재다. 우리는 자신의 욕망조차 온전히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며, 타인에게는 더더욱 계산되거나 혹은 반사적으로 왜곡된 언어를 내보낸다. 그 불투명함 속에서 진심을 걸러내는 일은, 매번 고운 망으로 바닷모래를 거르는 것처럼 정교하고 소모적인 작업이다. 내면의 에너지를 맹렬하게 소모해야 하는 이 짓을, 시간을 돌려 처음부터 다시 하라고 한다면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을 것이다.
가끔 내가 타인에게 지나치게 직설적으로, 혹은 다소 세게 말하는 것도 이 지독한 피로감에서 기인한다.
내 말을 듣는 상대방만큼은 '이 사람이 왜 이런 말을 할까', '숨겨진 뜻이 뭘까'라며 내 마음의 의도를 피곤하게 해석하고 추측하도록 내버려두고 싶지 않다는, 나름의 처절한 배려이자 방어인 셈이다. 싫으면 싫은 것이고, 좋으면 좋은 것이지. 이 단순한 명제가 어째서 그토록 많은 사람에게 어려운 일인가.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말을 했지만, 어쩌면 지옥은 타인이 아니라 타인이 구사하는 불투명한 언어일지도 모른다. 이토록 단순하고 명료한 진심조차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해 빙빙 돌려 말하거나 얄팍한 침묵 뒤에 숨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한 트럭을 가볍게 넘어간다.
그 불투명함이 나는 이제 버겁고 지겹다.
직접성은 무례함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상대를 하나의 독립적이고 성숙한 존재로 대우하겠다는 윤리적 선언에 가깝다. 상대가 내 말을 스스로 해석하고 감당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그것이 진짜 존중이다. 반면 지나치게 에둘러 말하는 것은 때로 배려처럼 위장한 통제이거나, 혹은 자신의 책임을 언어의 안개 속에 분산시키려는 회피다.
언어의 뉘앙스와 의도에 대해 덧붙이자면, 특히 영어를 배우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흔히 빠지는 큰 착각이 하나 있다. '영어에는 존댓말이 없다', 혹은 '한국어처럼 쿠션어나 예의를 차리는 표현이 없다'고 섣불리 믿는 것이다. 이는 언어의 형태적 껍데기만 보고 그 안의 논리를 읽지 못한 얕은 편견이다.
언어의 예의는 어미의 변형이나 경어 체계 같은 가시적 형태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훨씬 더 깊은 층위, 단어의 선택과 조동사의 미세한 강약, 가정법이 만들어내는 심리적 거리감 속에 은밀하게 깃들어 있다.
오히려 우리가 배우고 내뱉는 거의 모든 영어 문장의 기본값은 '상호 존중'이라는 형태의 존댓말을 띠고 있다. 한국어처럼 어미가 바뀌는 수직적인 존대법이 아닐 뿐, 영어는 조동사의 섬세한 활용과 단어의 선택, 가정법의 뉘앙스를 통해 훨씬 더 치밀하게 상대방의 공간을 배려하는 '수평적 존댓말'의 언어다. "Can you do this?"와 "Could you possibly do this?"는 같은 요청이 아니다. 전자는 능력을 묻는 질문이고, 후자는 상대의 공간을 조심스럽게 두드리는 행위다. 그 차이를 모르면 영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어 단어를 나열하는 것일 뿐이다.
쿠션어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쿠션의 재질과 위치가 다를 뿐이다. 한국어의 쿠션이 어미와 어투에 있다면, 영어의 쿠션은 단어의 선택과 문장의 구조 속에 숨어 있다. 때로는 내가 무심코 던진 단어 하나의 무게가 어떤 상황에서는 무례함의 극치로 작용하기도 하고, 관계의 성패를 가르는 중대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 보이지 않는 언어의 무게를 가볍게 여기는 순간, 소통은 어긋나고 관계는 무너진다.
언어는 단지 메시지를 전달하는 파이프라인이 아니다. 언어는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대우하는지를 매 순간 드러내는, 가장 솔직한 행위의 기록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이 가리키는 하나의 진실이 있다. 언어를 제대로 배운다는 것은 단어와 문법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내면에 더 정밀하게 닿는 법을 익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타인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 역시 더 선명하게 들여다보게 된다. 내가 어떤 단어를 무의식적으로 회피하는지, 어떤 문장 구조 뒤에 내 진짜 감정을 숨기는지. 언어는 거울이다. 다만 우리가 그 앞에 서기를 두려워할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직접적으로 말하기를 선택한다. 그것이 때로 날카롭게 들릴지라도.
언어의 안개 속에 숨지 않는 것, 그것이 내가 이 긴 피로 끝에 내린 가장 솔직한 결론이다.
결어
임시저장하고 넘기고 임시저장하고 넘기고 하는 양이 많아졋다. 무려 40개다.
괜찮은 주제인 것 같아 글을 쓰다보면, 나의 생각의 본질이 잘 다져지지 않아 끝이 흐지부지 마무리가 되는 아름답지 않은 글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글을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이 첫번째 이유.
두번째 이유는, 바빳다. 개강하고 운동하고 또 공부하고, 여유가 없엇다
JAVA, C++, PYTHON, GO 를 보고 있다.
구조론을 보면서 동시에 대학교 생활을 하고 이력서를 관리하고 포트폴리오를 관리하고 운동을 하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아침에는 글의 초안을 작성하고
++ 아니 생각해보니까, 일본어도 해야하잖아. 일본어는 일단 쓰는 것은 하지 않고 읽는 것만 하고 있다
쓰는 것은 나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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