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기에 앞서, 이 글이 어학병의 업무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궁금한 사람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부분은 

어학병 소속 부대의 정확한 위치와 세부적인 편제사항, 내부 시설,

병력현황 등에 대한 모든 내용은 특수 군사 II급비밀로 분류

이러한 사정을 이해해 달라.


 

    남자들만 아는 논산의 감성은 아무리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사람에게 말해도,
다른 남자들에게는 쉽게 공감하기는 어렵다.


  모든 것이 어려우며, 심지어 사회에서의 통념자체가 먹히지 않은 곳이며, 꽉 막힌 장소 그렇기에 그 장소, 군대를 다녀온 몇 남성들은, 그곳에서 자신의 생각에 지울 수 없는 얼룩이 남거나 혹은 상처만 남지만 그 인지 없이 생겨버린 상처와 얼룩의 존재를 본인들은 모른 채 살아간다. 그래서 가끔 대한민국이라는 공간에서는 회사를 가거나 아니면 어떤 조직 생활을 하게 될 때.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이 

"군대는 다녀오셨고요?"

라는 말을 하고는 한다. 이 말의 중점은 군대를 다녀왔다는 사실을 확인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조직생활의 시야가 있으며 혹은 어느 정도의 탐탁지 않은 일을 견뎌낼 수 있는 내성이 있냐는 말로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그렇게 들린다.

 

그리고 나에게 있어서 처음 마주한 군대라는 공간은 그런 공간이었다.

논산이라는 공간이 아무리 이전 90년대나 2000년대의 초반의 군대와는 절대 같지 않고

아무리 "좋아졌다"라는 공간이라고 해도
"좋아짐"이라는 것도
결국 상대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여지는 공간이기 때문에

 

이 말은 즉, 어떤 이들에게 "논산"은 모든 것이 쉽고 기억 속에서 위로를 주는 낭만이 넘치는 곳이었겠지만, 어떤 이들에겐 한없이 억압적이고, 폭력적이며 그리고 개성을 용납하지 않은 사회를 살아간 사람들 입장에서는 "사람을 만드는 곳"이라고 느껴지는 곳이기도 한다. 그 "사람"을 만드는 공간이라는 것이, 나에게 있어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매번 의구심을 자아내게 했었다.

 

대한민국에서 "사람"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 그리고 그 "사람"을 만드는 과정이 고작 한 달밖에 안 되는 것이라면

그리고, 군대를 다녀온 남성들이 대한민국의 대다수이라면, 왜 자기 자신들이 겪은 고통을, 다음 세대가 겪길 바라며, 그리고 자신과도 같은 사람을 만들고 싶어 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 한다. 

 

아무튼, 오늘은 그날의 기억을 말하고 싶다. 

군대에 가고 싶어서, 군대를 기쁘게 다녀온 사람의 입장에서는 군대를 가기 싫은 곳이라고 말하는 자들의 마음을 전부 공감하지 못하겠지만

 

육군 어학병(통역병) 복무 이야기

2023년 1월 27일 나는 한미연합사에서 어학병으로 전역을 했다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어디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지, 그리고 어떤 이야기를 내가 말을 할 수 있고, 어떤 이야기를 내가 말할 수

igewaedam630.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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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그 마음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설명하자면, 이 말은 마치 인지는 하고 무시하는 것이라면 그런 것인데 

쉽게 말해 이는 마치 불이 켜지는 방에 들어가는 마음과 별 다른 것이 없다. 우리가 밝은 방에 들어갈 때, 방에 빛이 있음을 인지는 하지만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군대에 가기 싫다고 속된 말로 징징 거리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난 그렇게 반응했다.

왜냐하면 군이라는 공간은 나에게 있어서는 다른 공간이니까

국방의 의무는 국민의 신성한 의무니까.

그렇기에

다녀온 사람들을 한 없이 고개 숙여 존중하지만

다녀오지 않은 "사람"을 한 없이 측은지심의 감정으로 보거나

 

혹은 

 

내 생각 속에서 "사람"의 개념을 달리 생각하게 된 것 같다.

 

 

여기서 말하는 측은 지심이라는 공간은, 국방의 의무라는 국민으로써의 신성한 의무를 다하지 못한 사람을 어딘가에 소속되지 못한 사람으로 보았었다. 그래서 군이라는 공간은 그런 곳이다, 사람의 생각을 그렇게 변하게 만든다.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다른 사람의 인생을 바라보는 시야를,

군대라는 창틀에 가둬 군필이냐
군필이 아니냐 하는 색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한다.

지극히 이분법 적인 사고, 사람이라면 누구던지 안 한 적이 없고 가장 거리를 두어야 하는 사고, 그리고 사람을 병들게 하며 혹은 세상 살아가는 것을 쉽게 만들어주는 사고. 그래도 한 가지 장점은 있었는데 삶을 단순하게 만들어 주니까

결국에는 군대를 다녀왔다는 이야기로 남자들은 쉽게 친구가 되고 쉽게 하나되고 그 고통을 이해하니까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친구는 나에게

 

한때, 내 친구는 나에게 나지막이 말한 적이 있다

 

그는 군대를 다녀오지 않았으며, 법원에서 4급 대체복무를 하였다. 

그의 말을 들었을 때는 나는 22살 미필의 시야였었고, 

그는 그의 대체 복무를 하면서 나에게 하소연 아닌 하소연을 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아무튼 그가 나에게 해준 말은 간단했다.

 

대한민국이라는 공간은, 군대의 PTSD를 가진 사람들이
서로서로 치료받기 위해 회사나 다른 공간을 만들어 다니는 것 같다고

 

 

그의 말을 나는 그저 사람들이 가고 싶지 않은 장소에 가는 것을 단순히 PTSD라는 단어를 이용해 묘사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그땐 그랬다.

 

하지만, 나는 그이의 생각을 너무 얕게 생각한 거였다.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이 말의 깊이는 굉장히 깊었던 것 같다.

 

어렸을 때 겪는 처음의 조직문화가 군대의 조직문화였고

그 군대의 조직문화는 대한민국 사회에 뼈 깊이 새겨져 있다고

이 사회의 모습이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는 나는 잘 모르겠다

 

조선이 독립을 찾고 임시정부를 만들어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어 갔을 때. 

그 시작을 군대로 시작해서?

 

아니면,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내려온 이후로 9대 대통령까지 한 사람이 군대의 관점으로 대한민국을 이끌어 나갔기 때문에? 

사회 발전의 뒤에는, 수많이 언급되지 않고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이 있겠지

 

아니면 오랜 그 이후, 스스로의 사조직을 앞 세워 다른 사람의 열망들을 짓밟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전 아무것도 모릅니다 판사님

 

그리고 이러한 생각의 끝의 귀결은 내 고통을 내 다음세대에게 넘겨주고 싶지 않음

 

내가 배운 가르침들을 스스로 한번 겪어보면서 배우길 원한다 하는 생각들이 매번 있다.

이러한 두 가지 생각의 차이와 의견의 충돌이 나로 하여금 끝없는 생각을 하게 한다. 당장은 답이 나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지만, 그 생각의 끝에는 언젠가 정답이 있지 않을까 의구심과 혹은 두가지 선택에 갈림길에서 올바른 길로 이끌어나가게 할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들 뿐이다. 또한 이런 생각의 과정을 나만 했다고 난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누구라도 이 일련의 생각의 과정을 자식을 키우는 남자라면 안 하지 않았을 테니까. 왜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된 것이라면 간단하다, 부모 되는 입장인 사람이면 자식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바라기 때문이라고 난 생각한다. 아직 부모가 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지금은 호주에 유학을 다녀온 사람이고, 그런 외부의 시야로 세상을 보는 것이기에 이런 시야를 갖게 된 나도, 생각이 많아지곤 한다. 어찌 보면 이 생각의 과정을 거치면, 나 자신이 한국을 벗어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도 그래도, 난 나 자신이 한국인인걸 부정할 수는 없다. 아니면 내가 그렇게 되고 싶었는 건지 아니면 그 변화를 두려워하는 것인지는 모른다. 

 

 

논산의 기억, 사람이 그리우면서도 장소는 그립지 않은 그 장소, 모든 것이 시작되는 그 장소, 논산

 

딸기로 유명한 장소라고 나는 알고 있지만, 막상 실제로는 딸기보다는 소똥의 냄새가 더 나며 훈련소에서 창밖으로 보이는 아파트단지의 모습인 사회의 모습과 위로 넘어갈 수 없는 벽, 그리고 혹여나 넘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만든 철조망들, 해외의 군사기지는 밖에서의 공격을 방해하기 위해서 그 벽을 치고 요새화를 하겠지만 한국 논산훈련소의 배치도는 오랜 역사를 자랑했기에 밖에서의 공격보다는, 안에서의 탈출을 막기 위해 구조화된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한다.

 

하루의 시간이, 평소에 겪는 하루보다 2배 이상 느리며 그리고 옆에 있는 동기가, 처음 보는 동기가 나중 가서는 가족보다 소중해 보이는 그 장소 그곳이 논산이었다. 20살 초반의 어린아이들이,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찾아오게 되거나 혹은 자기가 해야 할 것을 모르기 때문에 찾아오는 장소. 다양한 인생의 이야기를 가진 이들을 공장에서 몰딩해 찍어내듯이 다른 맞물리지 않는 이들을 맞물리게 만든다.

 

그러니, 당연히도, 적응을 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생길 수밖에

 

나는 군대가 재밌었다, 아니 재밌었다고 하면 좀 그러니, 즐거웠었다. 내 부대는 2x연대 3소대였었는데, 3소대 4소대의 생활관의 분위기는 누군가 국경선을 그어놨을 것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 이는 소대장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는데, 우리 소대장은 특전사(특수전사령부) 출신의 특수임무 훈련을 받은 중사 분이었었고, 옆소대의 소대장은 전역을 언젠가 기필코 하고야 말겠다는 말년 중사. 매번 고양된 목소리로 "응~ 안녀어엉" 하는 그의 목소리는 아직도 기억한다. 

 

정말, 달랐기에, 난 4소대가 부러우면서도, 3소대 소속으로써의 자부심이 있었다. 우리 소대는 특히 애들끼리 떠드는 것을 좋아했었는데, 조용한 걸 싫어하는 나는 하여금 그 분위기를 너무 사랑했기도 했으며 그 분위기를 만들게 하고는 있었다. 

곧 잘 이 때문에 마찰이 생기기도 하였는데, 그래도 물리적인 마찰은 없었으니, 한 달 동안의 분위기치고는 재밌게 논 정도. 

 

물론 너무 나서는 내 성격 탓도 있긴 했지만, 상관없었다. 그저 나는 지나가는 장소로만 생각했었으니까. 마치 오랫동안 타야 하는 고속버스를 타는 감정으로, 버스 안에 사람이 누가 타던 친해지겠다는 개념은 없었으니까. 어쩌다 보니 아까 말했던 4소대 소대장과 이름도 공유하고 친해진 적이 있는데, 하시는 말씀으로는 자기 와이프의 성씨가 내 성씨하고 같아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잘해주는 것도 있다고 말씀을 해주신 것은 있었다. 

 

물론,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고,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중사님은, "X까 이 새꺄" 하는 말로 웃으며 넘기고는 했으니까. 그런 그에게 난 수많은 훈련병들 중 하나였고 그렇게 중요하지 않으며 지나가는 일반 병사인지 혹은 병 x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군에가면 무조건 한명쯤 있는 사람

아무튼 그런 그에게 내 훈련소 이름표를 남겨주고 싶었는데,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고, 아니 오히려 사람을 너무 계속해서 만나고 헤어지기 때문에 본인의 임무에 집중해야 하니 또 다른 사사로운 정을 두지 않는 사람인 것 같았다. 

 

어차피 헤어질 애들인데, 굳이 정 주지 말자 

 

훈련소에서 오랜 군생활을 하다 보면 온갖 인간 군상을 만나게 되고, 그 온갖 인간 군상에서 나는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었을 테니. 이런 마인드가 조금은 섭섭하지만 그래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런 공간임을 나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기억에 남는, 목소리에서 쉰소리가 나는 원사분, 쉰소리란, 정말 목에 파이프를 넣어 소리가 빠지면서 나아가는 것인지 하는 생각이 드는 분이었는데, 병사의 선물을 하나하나 헤아려주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고 하면 생각이 많이 든다.

이들은 아버지 같으신 분들, 전쟁이 나면 본인의 사명감으로 전장으로 나가겠지만 그와 동시에 어린 병사들을 사지로 내몰고 싶지 않아 하는 그의 얼굴은 표정에서 잘 보였었다.

 

고작 표정만 보고 뭘 알 수 있느냐 하겠다마는,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사람의 태도와 어투에서 나오는 배려심이 넘치는 사람. 그 연륜 속에 분노를 절제할 줄도 아는 사람. 그런 원사분이 이었다.

목소리 좀 웃겨요

모든 것을 수리할 줄도 알며, 그저 쇳덩어리만 보면 머릿속에 있는 것도 손쉽게 만들어 내는 그런 사람, 이런 사람의 차갑지만 속에 박힌 따뜻함은 아직도 기억의 저편에서 매일 아침 나에게 야단을 내곤 하신다

 

훈련소 조교, 훈련병은 사실상 없는 계급이라, 이 훈련병들을 담당하는 훈련소 조교들의 계급은 보통 일병~상병 혹은 가짜계급장으로 하사~ 중사의 포지션을 맡고 있는데 이들의 이야기를 잊을 수가 있나.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전역하고도 만난 사람이고, 아직까지도 연락을 하고 있긴 하다.

 

그들의 이야기는 나중에 생각이 날 때, 다시 한번 하겠다.

그 육교를 기억하시나요

 

 

그리고 이 글의 제목인, 거꾸로 가는 열차 고작 4주간의 훈련, 길고도 짧은 논산의 한 달을 버틴 훈련소에서 나와 가는 자대 배치. 이 글을 읽는 군필자라면 첫 자대배치 감정이 어떤 감정이 드는지는 묘사를 하지 않아도 알고 있을 것이라고 난 생각한다. 정이라면 정이든 나의 훈련소 동기들을 뒤로하고 나아가는 평생 동기들의 장소

"자대"

 

난 자대를 이미 사령부로 배치를 명 받았기 때문에,

그 때문에 설레는 마음이 넘쳐났었다. 내 인생에 있어서, 두 번째로 즐거운 날이었으니까. 

 

 

참으로도 역설적인 부분은, 군 생활을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관점에서 자대로 가는 열차가, 뒤로 간다는 점이었다. 

이는 나로 하여금 여러 생각을 들게 하였었는데,  군이라는 공간 속에서 "자대"로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자리가, 뒤로 간다는 점은 이 감회를 새롭게 하였는데, 이는 훈련소의 진전이, 자대에서는 딱히 의미가 없는 행위로 변질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즉 훈련소에서 내가 성취한 "앞"이라는 개념이, 자대에서는 "특별한" 행위 자체가 아닐 테니까. 왜냐하면, 내가 가는 모든 이들이 훈련소를 수료했었으니까. 

 

즉, 이 한 달의 기간이 무의미한 일인 것.  

 

물론, 사회의 관점에서는 굉장히 유의미한 경험이었겠지만 훈련소 수료라는 것이 당연한 관점에서는 나의 한 달이라는 고난과 고생이 그렇게 특별할 게 없는 경험이었던 것. 

 

물론 자랑스러워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고작 한 줄의 계급장이었지만.

내 기준에서는 그 계급장의 크기는 크게 느껴졌으니까.

반짝반짝


아무튼, 이러한 생각을 뒤로하고, 어학병으로써의 삶을 시작하는건 나중에 이야기 하도록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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