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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ieri2026. 3. 29. 21:30

​"나 때는 말이야."


​언제부턴가 이 짧은 문장은 낡은 전축에서 튀는 지루한 잡음처럼 취급받았다. 젊은 세대에게 이 말은 그저 닳고 닳은 무용담, 빛바랜 훈장을 만지작거리는 어른들의 서곡처럼 들리기 십상이다. 나 역시 그들이 자꾸만 먼지 쌓인 서랍장을 열어젖히는 이유는, 그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찬란했던 청춘의 그림자를 핥기 위함이라 여겼다. 하지만 어느 날, 그 녹슨 톱니바퀴 같은 이야기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자 전혀 다른 주파수가 잡히기 시작했다.

​어른들이 수없이 되감기 하는 기억의 필름 속에는 '거대한 자아'가 아닌, 시대의 공기처럼 짙게 배어 있던 '온기'가 스크린을 채우고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 속에는 밥 짓는 냄새가 복도를 타고 넘어오면 남의 집 아이까지 기꺼이 식탁에 앉히던 저녁이 있었다. 동네 골목에서 뛰어놀 때면, 규칙의 모서리에 베이지 않도록 서툰 아이를 '깍두기'라는 보송보송한 이불로 감싸주던 넉넉함. 핸드폰이 나오기 전, 손끝으로 톱니를 감아 필름을 넘기고 현상소의 인화지 냄새를 설레며 기다리던 시간들, 매끈한 액정 대신 거친 달력 종이 위에 잉크를 꾹꾹 눌러 일정을 새기던 투박한 손길들이 있었다.

​예기치 않게 바퀴가 진흙탕에 빠지더라도, 시계만 노려보며 짜증을 내는 대신 기꺼이 차에서 내려 다 함께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하루를 유쾌하게 낭비하던 연대가 있었다. 메신저의 '1'이 지워지는 속도에 일희일비하는 지금과 달리, 일주일 내내 우체통이 비어 있어도 보이지 않는 끈이 이어져 있음을 의심치 않던 묵직한 닻 같은 믿음. 누군가에게 건네는 문장들은 잉크에 스민 눈물의 농도를 헤아리며, 타인의 마음에 닿기 전까지 수없이 체온을 덧입었다.

​어쩌다 마주한 낯선 이국의 풍경은 팍팍한 현실을 뚫고 싹을 틔울 수 있다는 '가능성의 망원경'이었고, 그곳에서 길어 올린 감정의 우물은 바닥을 알 수 없을 만큼 깊고 따뜻했다. 모든 것이 귀하고 간절했던 만큼, 사람과 세상을 대하는 마음의 밀도가 달랐던 것이다.

​그들이 밤낮으로 부르는 향수가는 '빛나던 나'를 향한 찬가가 아니라, '서로의 체온으로 존재의 테두리를 확인하던 시대'를 향한 진혼곡이었다. 돌이켜보면 그때는 가난이라는 서슬 퍼런 짐승과 목숨 걸고 싸워야 했던 벼랑 끝의 시대였다. 누군가는 그것을 숨 막히는 '집단주의'라는 쇠사슬로 깎아내리지만, 당시에 그것은 혹독한 겨울을 견디기 위해 서로의 몸을 촘촘히 엮은 거대한 털실옷이자 사회를 밀고 나가는 강력한 엔진이었다.

​반면, 21세기의 매끈한 유리창 너머에 선 우리는 어떠한가. 세상은 손가락 하나로 모든 것을 통제할 만큼 눈부시지만, 우리는 더 이상 타인의 품에서 위안의 불씨를 찾지 않는다. '깍두기'를 품어주던 넉넉한 품은 사라지고, 공정함이라는 차가운 메스로 서로의 서툼을 날카롭게 도려내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타인의 고뇌는 픽셀로 쪼개져 찰나의 조롱과 가벼운 유머로 증발해 버리고, 사람의 틈새를 유영하던 따뜻한 문장들은 깃털보다 가벼워져 차가운 스크린 위를 부유한다. 우리는 '효율'이라는 폭주 기관차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는 '연민'이라는 이름의 신경줄을 스스로 끊어버린 것은 아닐까. 맹렬하게 돌아가는 세상의 톱니바퀴는 굉음을 내며 인간의 고유한 결을 갉아먹고, 나침반을 잃은 리더들은 책임의 닻을 끊어버린 채 파도에 휩쓸려 표류하고 있다.

​어른들의 낡은 넋두리가 새삼 날 선 가시처럼 가슴을 찌르는 이유는, 조롱과 혐오를 팝콘처럼 씹어 삼키는 이 빙하기 같은 시대에 대한 내 안의 서늘한 공포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들이 자꾸만 과거를 이야기하는 진짜 이유는, 지나간 청춘에 대한 값싼 미련이 아니다. 인간이 타인을 끌어안으며 빚어내던 '사람 냄새'가 무균실 같은 세상 속에서 소독되어 날아가는 것을 지켜보는 실존적 비명이다.

​그러니 이제 "나 때는 말이야"라며 헛기침을 하는 어른들을 향해 너무 빨리 귀를 닫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투박하고 거친 주름 속에는 단순히 멈춰버린 시계에 대한 집착이 있는 것이 아니다. 점차 얼어붙어 가는 이 서늘한 세상에, 어떻게든 작은 화톳불 하나라도 피워두고 싶은 서툴지만 간절한 사랑이 타오르고 있다.

그들을 연민한다. 나를 본다. 나 또한, 다음세대를 본다. 그들에게 잃어가는 가치를 선물하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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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ie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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