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평화(Peace for our time)."
나는 이 문장을 아프도록 좋아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짧은 활자들 사이에 응축된 인간의 서늘한 오만함을 매혹적으로 느낀다. 1938년, 영국의 총리 네빌 체임벌린은 독일 뮌헨에서 당대의 독재자와 협정을 맺고 돌아와 군중 앞에서 얇은 종잇장을 흔들며 이 문장을 외쳤다. 전쟁을 막아냈다는, 마침내 평화가 도래했다는 확신에 찬 선언.
그러나 역사가 증명하듯, 그 종잇장이 세상에 나부낀 순간은 가장 끔찍한 파국으로 향하는 완벽한 발판이 되었다. 인간이 스스로 평화를 통제하고 재단할 수 있다고 믿었던 그 얄팍한 착각이, 가장 잔혹한 대가를 불러온 셈이다.
최근 세상이 굴러가는 궤적을 지켜볼 때면, 불현듯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시감에 사로잡힌다. 1938년의 흑백 사진 속, 종잇장 하나에 환호하던 그 아슬아슬한 평화의 냄새가 지금 우리가 숨 쉬는 공기 중에도 짙게 배어 있는 것만 같아서다.
가장 먼저 감각되는 것은 정치의 붕괴다. 트럼프를 비롯해 전 세계를 휩쓰는 지도자들의 행보는 대중의 마음에 돌이킬 수 없는 냉소와 불신의 씨앗을 심고 있다. 본래 대중은 권력을 온전히 믿지 않으며, 그것은 민주주의의 건전한 그림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도자란, 적어도 사회가 벼랑 끝에 섰을 때 갈라진 틈을 꿰매는 '통합의 상징'이자 최후의 보루가 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작금의 정치는 오히려 갈등을 연료 삼아 폭주한다. 지지자들의 아드레날린을 쥐어짜기 위해 혐오를 전시하고, 그 매캐한 연기 속에서 정치를 향한 최소한의 기대마저 재가 되어 흩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 기시감의 진짜 공포는 저 높은 곳의 정치가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우리의 일상 가장 낮은 곳에서 완성된다.
우리는 지금 서로를 찌르지 않기 위해 철저히 거리를 두는, 이른바 '배려를 위한 단절'의 시대를 살고 있다. 타인에게 상처 주지 않기 위해, 혹은 내 영역을 침범받지 않기 위해 우리는 보이지 않는 선을 긋고 각자의 섬으로 유배를 떠난다.
마찰음이 들리지 않는 무균실. 우리는 이 지독한 고립을 예의 바르고 세련된 '평화'라 부르며 안도한다. 하지만 서로 부딪히며 깨어지고, 피 흘리며 다시 봉합될 기회조차 거세당한 사회는, 작은 충격에도 바스러질 만큼 앙상하게 병들어 있다.
이 소리 없는 단절 위로, 기술이 축조한 안락함이 우리의 눈을 완벽하게 가린다. 스마트폰 속 영리한 알고리즘은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 정제하여 먹여주고, 내 입맛에 맞는 세상만을 끝없이 복제해 낸다. 누군가의 삶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을지 모를 진짜 현실의 비명은, 매일 쏟아지는 자극적인 도파민과 편안한 알고리즘의 요람 속에서 마취된 듯 잊혀진다.
체임벌린의 펄럭이는 종잇장에 눈이 멀었던 1938년의 군중들처럼, 우리는 매일 밤 침대 위에서 빛나는 6인치 액정 화면에 자발적으로 눈을 가리고 있다.
당장 내 머리 위로 포탄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총성이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이것을 감히 평화라 부를 수 있을까. 이 매끈한 고요함의 이면에서 누군가의 삶은 이미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 재난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솔직히 말해, 나는 잘 모르겠다. 그 질문에 명쾌하게 답할 거창한 통찰도, 섣부른 희망을 노래할 용기도 내게는 없다. 그저 '배려'라는 핑계로 철저히 모래알처럼 흩어진 우리들의 모습과, 끝을 알 수 없는 이 혐오의 궤도 속에서 내가 느끼는 불길한 기시감이 두려울 뿐이다. 인간의 오만함이 또다시 역사의 잔혹한 농담을 기어코 반복하려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지금 각자의 좁은 방에 갇힌 채, 알고리즘이 띄워주는 '우리 시대의 평화'라는 환영을 보며 안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등 뒤로 거대한 폭풍이 몰려오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죽음의 이야기의 피 흘리는 고통을 우리는 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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