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기에 앞서, 이 글이 어학병의 업무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궁금한 사람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부분은 

어학병 소속 부대의 정확한 위치와 세부적인 편제사항, 내부 시설,

병력현황 등에 대한 모든 내용은 특수 군사 II급비밀로 분류

이러한 사정을 이해해 달라.


 

    남자들만 아는 논산의 감성은 아무리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사람에게 말해도,
다른 남자들에게는 쉽게 공감하기는 어렵다.


  모든 것이 어려우며, 심지어 사회에서의 통념자체가 먹히지 않은 곳이며, 꽉 막힌 장소 그렇기에 그 장소, 군대를 다녀온 몇 남성들은, 그곳에서 자신의 생각에 지울 수 없는 얼룩이 남거나 혹은 상처만 남지만 그 인지 없이 생겨버린 상처와 얼룩의 존재를 본인들은 모른 채 살아간다. 그래서 가끔 대한민국이라는 공간에서는 회사를 가거나 아니면 어떤 조직 생활을 하게 될 때.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이 

"군대는 다녀오셨고요?"

라는 말을 하고는 한다. 이 말의 중점은 군대를 다녀왔다는 사실을 확인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조직생활의 시야가 있으며 혹은 어느 정도의 탐탁지 않은 일을 견뎌낼 수 있는 내성이 있냐는 말로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그렇게 들린다.

 

그리고 나에게 있어서 처음 마주한 군대라는 공간은 그런 공간이었다.

논산이라는 공간이 아무리 이전 90년대나 2000년대의 초반의 군대와는 절대 같지 않고

아무리 "좋아졌다"라는 공간이라고 해도
"좋아짐"이라는 것도
결국 상대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여지는 공간이기 때문에

 

이 말은 즉, 어떤 이들에게 "논산"은 모든 것이 쉽고 기억 속에서 위로를 주는 낭만이 넘치는 곳이었겠지만, 어떤 이들에겐 한없이 억압적이고, 폭력적이며 그리고 개성을 용납하지 않은 사회를 살아간 사람들 입장에서는 "사람을 만드는 곳"이라고 느껴지는 곳이기도 한다. 그 "사람"을 만드는 공간이라는 것이, 나에게 있어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매번 의구심을 자아내게 했었다.

 

대한민국에서 "사람"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 그리고 그 "사람"을 만드는 과정이 고작 한 달밖에 안 되는 것이라면

그리고, 군대를 다녀온 남성들이 대한민국의 대다수이라면, 왜 자기 자신들이 겪은 고통을, 다음 세대가 겪길 바라며, 그리고 자신과도 같은 사람을 만들고 싶어 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 한다. 

 

아무튼, 오늘은 그날의 기억을 말하고 싶다. 

군대에 가고 싶어서, 군대를 기쁘게 다녀온 사람의 입장에서는 군대를 가기 싫은 곳이라고 말하는 자들의 마음을 전부 공감하지 못하겠지만

 

육군 어학병(통역병) 복무 이야기

2023년 1월 27일 나는 한미연합사에서 어학병으로 전역을 했다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어디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지, 그리고 어떤 이야기를 내가 말을 할 수 있고, 어떤 이야기를 내가 말할 수

igewaedam630.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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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그 마음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설명하자면, 이 말은 마치 인지는 하고 무시하는 것이라면 그런 것인데 

쉽게 말해 이는 마치 불이 켜지는 방에 들어가는 마음과 별 다른 것이 없다. 우리가 밝은 방에 들어갈 때, 방에 빛이 있음을 인지는 하지만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군대에 가기 싫다고 속된 말로 징징 거리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난 그렇게 반응했다.

왜냐하면 군이라는 공간은 나에게 있어서는 다른 공간이니까

국방의 의무는 국민의 신성한 의무니까.

그렇기에

다녀온 사람들을 한 없이 고개 숙여 존중하지만

다녀오지 않은 "사람"을 한 없이 측은지심의 감정으로 보거나

 

혹은 

 

내 생각 속에서 "사람"의 개념을 달리 생각하게 된 것 같다.

 

 

여기서 말하는 측은 지심이라는 공간은, 국방의 의무라는 국민으로써의 신성한 의무를 다하지 못한 사람을 어딘가에 소속되지 못한 사람으로 보았었다. 그래서 군이라는 공간은 그런 곳이다, 사람의 생각을 그렇게 변하게 만든다.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다른 사람의 인생을 바라보는 시야를,

군대라는 창틀에 가둬 군필이냐
군필이 아니냐 하는 색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한다.

지극히 이분법 적인 사고, 사람이라면 누구던지 안 한 적이 없고 가장 거리를 두어야 하는 사고, 그리고 사람을 병들게 하며 혹은 세상 살아가는 것을 쉽게 만들어주는 사고. 그래도 한 가지 장점은 있었는데 삶을 단순하게 만들어 주니까

결국에는 군대를 다녀왔다는 이야기로 남자들은 쉽게 친구가 되고 쉽게 하나되고 그 고통을 이해하니까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친구는 나에게

 

한때, 내 친구는 나에게 나지막이 말한 적이 있다

 

그는 군대를 다녀오지 않았으며, 법원에서 4급 대체복무를 하였다. 

그의 말을 들었을 때는 나는 22살 미필의 시야였었고, 

그는 그의 대체 복무를 하면서 나에게 하소연 아닌 하소연을 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아무튼 그가 나에게 해준 말은 간단했다.

 

대한민국이라는 공간은, 군대의 PTSD를 가진 사람들이
서로서로 치료받기 위해 회사나 다른 공간을 만들어 다니는 것 같다고

 

 

그의 말을 나는 그저 사람들이 가고 싶지 않은 장소에 가는 것을 단순히 PTSD라는 단어를 이용해 묘사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그땐 그랬다.

 

하지만, 나는 그이의 생각을 너무 얕게 생각한 거였다.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이 말의 깊이는 굉장히 깊었던 것 같다.

 

어렸을 때 겪는 처음의 조직문화가 군대의 조직문화였고

그 군대의 조직문화는 대한민국 사회에 뼈 깊이 새겨져 있다고

이 사회의 모습이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는 나는 잘 모르겠다

 

조선이 독립을 찾고 임시정부를 만들어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어 갔을 때. 

그 시작을 군대로 시작해서?

 

아니면,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내려온 이후로 9대 대통령까지 한 사람이 군대의 관점으로 대한민국을 이끌어 나갔기 때문에? 

사회 발전의 뒤에는, 수많이 언급되지 않고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이 있겠지

 

아니면 오랜 그 이후, 스스로의 사조직을 앞 세워 다른 사람의 열망들을 짓밟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전 아무것도 모릅니다 판사님

 

그리고 이러한 생각의 끝의 귀결은 내 고통을 내 다음세대에게 넘겨주고 싶지 않음

 

내가 배운 가르침들을 스스로 한번 겪어보면서 배우길 원한다 하는 생각들이 매번 있다.

이러한 두 가지 생각의 차이와 의견의 충돌이 나로 하여금 끝없는 생각을 하게 한다. 당장은 답이 나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지만, 그 생각의 끝에는 언젠가 정답이 있지 않을까 의구심과 혹은 두가지 선택에 갈림길에서 올바른 길로 이끌어나가게 할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들 뿐이다. 또한 이런 생각의 과정을 나만 했다고 난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누구라도 이 일련의 생각의 과정을 자식을 키우는 남자라면 안 하지 않았을 테니까. 왜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된 것이라면 간단하다, 부모 되는 입장인 사람이면 자식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바라기 때문이라고 난 생각한다. 아직 부모가 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지금은 호주에 유학을 다녀온 사람이고, 그런 외부의 시야로 세상을 보는 것이기에 이런 시야를 갖게 된 나도, 생각이 많아지곤 한다. 어찌 보면 이 생각의 과정을 거치면, 나 자신이 한국을 벗어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도 그래도, 난 나 자신이 한국인인걸 부정할 수는 없다. 아니면 내가 그렇게 되고 싶었는 건지 아니면 그 변화를 두려워하는 것인지는 모른다. 

 

 

논산의 기억, 사람이 그리우면서도 장소는 그립지 않은 그 장소, 모든 것이 시작되는 그 장소, 논산

 

딸기로 유명한 장소라고 나는 알고 있지만, 막상 실제로는 딸기보다는 소똥의 냄새가 더 나며 훈련소에서 창밖으로 보이는 아파트단지의 모습인 사회의 모습과 위로 넘어갈 수 없는 벽, 그리고 혹여나 넘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만든 철조망들, 해외의 군사기지는 밖에서의 공격을 방해하기 위해서 그 벽을 치고 요새화를 하겠지만 한국 논산훈련소의 배치도는 오랜 역사를 자랑했기에 밖에서의 공격보다는, 안에서의 탈출을 막기 위해 구조화된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한다.

 

하루의 시간이, 평소에 겪는 하루보다 2배 이상 느리며 그리고 옆에 있는 동기가, 처음 보는 동기가 나중 가서는 가족보다 소중해 보이는 그 장소 그곳이 논산이었다. 20살 초반의 어린아이들이,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찾아오게 되거나 혹은 자기가 해야 할 것을 모르기 때문에 찾아오는 장소. 다양한 인생의 이야기를 가진 이들을 공장에서 몰딩해 찍어내듯이 다른 맞물리지 않는 이들을 맞물리게 만든다.

 

그러니, 당연히도, 적응을 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생길 수밖에

 

나는 군대가 재밌었다, 아니 재밌었다고 하면 좀 그러니, 즐거웠었다. 내 부대는 2x연대 3소대였었는데, 3소대 4소대의 생활관의 분위기는 누군가 국경선을 그어놨을 것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 이는 소대장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는데, 우리 소대장은 특전사(특수전사령부) 출신의 특수임무 훈련을 받은 중사 분이었었고, 옆소대의 소대장은 전역을 언젠가 기필코 하고야 말겠다는 말년 중사. 매번 고양된 목소리로 "응~ 안녀어엉" 하는 그의 목소리는 아직도 기억한다. 

 

정말, 달랐기에, 난 4소대가 부러우면서도, 3소대 소속으로써의 자부심이 있었다. 우리 소대는 특히 애들끼리 떠드는 것을 좋아했었는데, 조용한 걸 싫어하는 나는 하여금 그 분위기를 너무 사랑했기도 했으며 그 분위기를 만들게 하고는 있었다. 

곧 잘 이 때문에 마찰이 생기기도 하였는데, 그래도 물리적인 마찰은 없었으니, 한 달 동안의 분위기치고는 재밌게 논 정도. 

 

물론 너무 나서는 내 성격 탓도 있긴 했지만, 상관없었다. 그저 나는 지나가는 장소로만 생각했었으니까. 마치 오랫동안 타야 하는 고속버스를 타는 감정으로, 버스 안에 사람이 누가 타던 친해지겠다는 개념은 없었으니까. 어쩌다 보니 아까 말했던 4소대 소대장과 이름도 공유하고 친해진 적이 있는데, 하시는 말씀으로는 자기 와이프의 성씨가 내 성씨하고 같아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잘해주는 것도 있다고 말씀을 해주신 것은 있었다. 

 

물론,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고,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중사님은, "X까 이 새꺄" 하는 말로 웃으며 넘기고는 했으니까. 그런 그에게 난 수많은 훈련병들 중 하나였고 그렇게 중요하지 않으며 지나가는 일반 병사인지 혹은 병 x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군에가면 무조건 한명쯤 있는 사람

아무튼 그런 그에게 내 훈련소 이름표를 남겨주고 싶었는데,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고, 아니 오히려 사람을 너무 계속해서 만나고 헤어지기 때문에 본인의 임무에 집중해야 하니 또 다른 사사로운 정을 두지 않는 사람인 것 같았다. 

 

어차피 헤어질 애들인데, 굳이 정 주지 말자 

 

훈련소에서 오랜 군생활을 하다 보면 온갖 인간 군상을 만나게 되고, 그 온갖 인간 군상에서 나는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었을 테니. 이런 마인드가 조금은 섭섭하지만 그래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런 공간임을 나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기억에 남는, 목소리에서 쉰소리가 나는 원사분, 쉰소리란, 정말 목에 파이프를 넣어 소리가 빠지면서 나아가는 것인지 하는 생각이 드는 분이었는데, 병사의 선물을 하나하나 헤아려주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고 하면 생각이 많이 든다.

이들은 아버지 같으신 분들, 전쟁이 나면 본인의 사명감으로 전장으로 나가겠지만 그와 동시에 어린 병사들을 사지로 내몰고 싶지 않아 하는 그의 얼굴은 표정에서 잘 보였었다.

 

고작 표정만 보고 뭘 알 수 있느냐 하겠다마는,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사람의 태도와 어투에서 나오는 배려심이 넘치는 사람. 그 연륜 속에 분노를 절제할 줄도 아는 사람. 그런 원사분이 이었다.

목소리 좀 웃겨요

모든 것을 수리할 줄도 알며, 그저 쇳덩어리만 보면 머릿속에 있는 것도 손쉽게 만들어 내는 그런 사람, 이런 사람의 차갑지만 속에 박힌 따뜻함은 아직도 기억의 저편에서 매일 아침 나에게 야단을 내곤 하신다

 

훈련소 조교, 훈련병은 사실상 없는 계급이라, 이 훈련병들을 담당하는 훈련소 조교들의 계급은 보통 일병~상병 혹은 가짜계급장으로 하사~ 중사의 포지션을 맡고 있는데 이들의 이야기를 잊을 수가 있나.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전역하고도 만난 사람이고, 아직까지도 연락을 하고 있긴 하다.

 

그들의 이야기는 나중에 생각이 날 때, 다시 한번 하겠다.

그 육교를 기억하시나요

 

 

그리고 이 글의 제목인, 거꾸로 가는 열차 고작 4주간의 훈련, 길고도 짧은 논산의 한 달을 버틴 훈련소에서 나와 가는 자대 배치. 이 글을 읽는 군필자라면 첫 자대배치 감정이 어떤 감정이 드는지는 묘사를 하지 않아도 알고 있을 것이라고 난 생각한다. 정이라면 정이든 나의 훈련소 동기들을 뒤로하고 나아가는 평생 동기들의 장소

"자대"

 

난 자대를 이미 사령부로 배치를 명 받았기 때문에,

그 때문에 설레는 마음이 넘쳐났었다. 내 인생에 있어서, 두 번째로 즐거운 날이었으니까. 

 

 

참으로도 역설적인 부분은, 군 생활을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관점에서 자대로 가는 열차가, 뒤로 간다는 점이었다. 

이는 나로 하여금 여러 생각을 들게 하였었는데,  군이라는 공간 속에서 "자대"로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자리가, 뒤로 간다는 점은 이 감회를 새롭게 하였는데, 이는 훈련소의 진전이, 자대에서는 딱히 의미가 없는 행위로 변질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즉 훈련소에서 내가 성취한 "앞"이라는 개념이, 자대에서는 "특별한" 행위 자체가 아닐 테니까. 왜냐하면, 내가 가는 모든 이들이 훈련소를 수료했었으니까. 

 

즉, 이 한 달의 기간이 무의미한 일인 것.  

 

물론, 사회의 관점에서는 굉장히 유의미한 경험이었겠지만 훈련소 수료라는 것이 당연한 관점에서는 나의 한 달이라는 고난과 고생이 그렇게 특별할 게 없는 경험이었던 것. 

 

물론 자랑스러워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고작 한 줄의 계급장이었지만.

내 기준에서는 그 계급장의 크기는 크게 느껴졌으니까.

반짝반짝


아무튼, 이러한 생각을 뒤로하고, 어학병으로써의 삶을 시작하는건 나중에 이야기 하도록하겠다. 

 

제목 진짜예요? 진짜 군대에서 하루 더 복무했어요? 멍청이예요? 아님 애국자예요?? 

이 글의 제목은 실화를 바탕으로, 아무런 과장없이, 객관적으로 기록된 내 이야기니까 말이다. 

부끄러워서 친구들에게도 이야기를 하지도 않았으며, 가족들에게 이야기도 하지 않은 것이지만 온라인에서 만큼은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여포니까 공공연히 태연하게 작성하도록 하겠다. 

 

 

때는 마지막 찍턴을 위해 복귀했던 날

신분 상으로는 병장이었던 시절, 그리고 인생의 계획이 유학으로 결정되어 호주로 가기로 결정되었던 시기, 그러니까 요약을 하자면 병장(군휴학, 전북대학교 3학년) 이었다. 준비된 서류도 없었고 IELTS 점수도 없었고, 전역 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공부를 하기는 싫었고 그렇다고 친구들 (이미 취업함, 여자친구 만나느라 바쁨, 돈 없음, 시간대가 안 맞음)에게 방해가 되고 싶었지는 않던 시절, 난 굉장히 무료하고 심심한, 마치 은퇴를 앞둔 회장님의 마음일까? 그냥 너무 심심했다. 

 

얼마나 심심했는지, 군대에서 일이라도 하고 싶었다. 작업이라도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군대는 나에게 전역자의 예우를 다했고 안타깝게도 행보관님은 나에게 복무를 허용하지 않았다. 분명 간부님들 마음속에서는 어차피 나갈 애들인데 이런 애한테 굳이 일 시킬 필요도 없고 개인의 생활을 존중한 것이 분명하였겠지. 

 

하지만, 난 심심한 말년 병장, 심심하니까, 심심하니까 이병/일병 들의 일을 뺐고 싶었다. 부조리는 아니었던 것이, 원래 내 일이었던 것이었으니까. 오히려 내가 내 후임의 일을 해 줌으로써 내 후임이 편안하다면 나도 만족하고 그도 만족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겠는가? 

 

그런 마음으로, 상황은 발생한다 

 

야간 경계 근무 인원 02:00 - 04:00 시 복무자가 격리됬는데요, 대체할 인원이 없어 

 

찍턴이었지만 새벽에 잠이 안와서, 경계근무 하는 애들 뭐 하고 있나 심심해 군복을 입고 돌아다니던 시절, 부대의 지리는 내 머릿속에 있었고 새로운 건물이 지어졌다길래 돌아다니고 싶었었다.

 

잠도 안오는 김에 12시부터 모든 곳을 들 쑤시고 다녔었다. 찍턴을 하는 2주 동안 무엇이 변했나, 다른 생활관의 분위기는 어떤가, 아니면 내 후임들이던, 내 동기들이던 뭘 하고 있을까? 

 

2층을 돌아보고, 1층 지휘통제실에 방문해 당시 야간 당직을 서고 있던 A 상병이랑 노가리(이야기) 까러 갔다. 근데 당직 사관님의 전전 긍긍하는 모습이 보이는 것이다.

 듣자 하니, 야간 당직 근무표의 2시 4시 복무자가 격리되어 대체자가 필요했었다. 하지만 대다수가 코로나 때문에 복무가 불가능한 상황, 그리고 군 예규에 따라 대체 복무할 수 있는 인원이 없어 외부 병력을 충원해야 하나

 

아니면 새벽에 다른 병사를 깨워 굳이 구태여 상황을 설명하고 자원자를 받아야 하나 이럴 방도가 없어 전전긍긍하던 그때

 

심심한 내가 

 

 "그거 제가 하겠습니다, 어차피 전역한 것은 맞는데, 신분상으로는 군인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문제는 해결될 것입니다"

 

당직사관 분은 말씀하셨다.

"아니 그래도, 네가 그렇게 해결해 주겠다면 고마운 일인데.. 전역자가 그런 거 한 거 내 군대 경험 4년 동안 없던 일이고..... 그래도 괜찮겠어? " 

 

말을 천천히 하고 있었다. 당황스럽지만 그 감정을 보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분명했다. 혹은 내가 어떠한 악의를 숨기고 또 다른 보상을 바라고 거래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아니었을까? 분명 그렇게 한 선임도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난 대답했다, 

 

 

"난 심심하니까요" 

 

"? 무슨 이상한 소리니, 진짜" 

 

"거짓말 아니고 저 정말 심심해서 군대에서 좋은 기억도 많고 재밌는 경험도 많이 했는데, 이것도 하나의 이벤트 상황이 아니겠습니까? 저에게 있어서 군대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은 그냥 살면서 재밌는 일련의 사건 사고 중 하나였습니다." 

 

A 상병은, 나에게 말했다 

 

"형 X 신이야?"

 

"조용히 해 , 지금 엄청 재밌는 상황을 만들어서 행보관님이나 본부대장님이나 이런 소식 들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난 궁금하니까 " 

 

나는 정말 이렇게 말했다, 행보관님이나 본부대장님이나 다들 바쁘실 때이기도 하고 매번 병사들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위에서 아래에서 괴롭힘 받는 중간직의 마음을 난 깊이 이해하고는 있었으니까. 무엇보다도 당장 귀찮은 일이라고 해도 정말 진짜 하늘의 맹세코 심심한 병장이었으니까.  

 

 

"형... 형은 괜찮을지 몰라도 난 아직 군 생활 좀 남았어.... " 

 

이 말은 분명 나로 인해 발생한 후속조치로 인해 생길 잡다한 규제들이 본인들을 얽매일까 봐 하는 이야기겠지 혹은 내 이야기로 행보관님이나 아니면 본부대장님이나 미래의 병사들에게 혹은 미래의 전역자들에게 '00 이는 전역을 해도 애국심을 갖고 복귀해 당직을 섰다' 하는 정훈 교육을 하게 될지 하는 걱정에서 나오는 말이었다. 얼마나 귀찮은 선례를 남기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 어린 마음을 난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 나는 심심했고, 심심했고 , 그리고 심심했다. 

 

그 와중에 당직사관 님은 복무지에 적힌 격리된 병사의 이름을 삭선으로 긋고 그 위에 나의 이름을 적고 내가 사인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눈빛과, 이런 병사는 어떤 병사인가 하는 의문, 그리고 심심하다는 의도는 어떠한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당장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안도감을 안고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그렇다, 난 이런 사람들의 문제가 혼란스럽게 해결될 때 짓는 그 난해한 표정을 좋아한다. 

의도를 모르는 다른 사람의 선의 속에 그리고 그 선의 안에 어떠한 악의도 없으며 그저 본인의 만족감을 위해 희생을 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누구라도 그러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 만약 이러한 상황이 자기 자신에게 발생을 한다면 본인은 안 할 것이지만 의외의 상황이 발생한 것이니까 

 

 

어찌 되었으나 문제는 해결이 될 것이고 당장은 의심스러우나 선택지가 없으니 찾아야 하는 해결책이 오직 내가 제안한 선택지일 때. 그런 상황 속에서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이 나는 너무 좋았다. 

 

"만약에, 근무자 문제라면은 행보관님에게 던 본부대장님이던 좋게 설명하고 제가 했다고 말씀해 주십시오 그리고 제가 바라는 건 맛있는 음식이나 아니면 제 후임 편하게 군 생활해 달라는 거치장스러운 말은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제가 무슨 거래를 할 수 있는 입지에도 존재하고 있지는 않으니까요. 전 그냥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행보관님과 본부대장님의 표정이 궁급합니다.  서류상 전역자가 복무에 들어간다는 것을 반드시 행보관님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 그리고 전 새벽에 조용히 떠나렵니다 "

 

이런 이상한 소리 괘변과 함께, 심심한 나는, 아니 병장인  난 복무지에 사인을 하고 군복을 정리한 다음 

지나가는 길에 나로 인해 수정될 필요가 있는 행정서류를 작성하고 있는 A 상병에게 지나가며 말했다.

"야, 내 인생 술자리 썰 하나 사러 가는 건데 이 정도면 괜찮은 거래 아니냐" 

 

"야 그리고 12-2시 누구냐? "

A 상병은 답했다.

"어.. B일병이야"

그 말을 들은 나는

"걔 나 아냐? 모르지 않냐? 재밌겠는데"

온갖 악의에 휘둘려있는 웃음을 지고는 나는 근심 어린 걱정을 하고 있는 A 상병을 뒤로하고, 지통실 문을 나섰다. 추운 겨울이었다. 시간은 2022년 12월 말, 2021년 7월, 여름 빛깔이 도는 군대에서 이제 그 활기참을 뒤로하고 각자의 시간을 위해 떠난 내 동기들을 생각하며, 

 

쌓인 눈들을 밟으며, 뽀드득뽀드득하는 그 소리가 이제는 얼마나 달콤한 소리로 들리던가. 새벽 5시에 기상하여 당직을 겨우 끝내고도 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내 얼굴을 비치던 붉은색 취침등에 눈도 제대로 못 뜨고 그저 전신의 감각으로 터벅터벅 걸어가 눈 삽을 들고 제설을 했던 그 장소를

 

난 이제, 웃으면서 보고 있다.

 

그 일말의 시련과 고통이 나에게 어떠한 성장을 줬는지 모른 채, 어떠한 이야기를 담게 되는지 나는 인지하고 있지 아니하고 가벼운 발걸음을 들고 난 경계근무에 나선다. 

 

그렇다, 마음이다, 이 마음이었다. 이 불변의 진리, 아무리 하기 싫었던 일도 사람의 상황이 어떠한 상황과 생각에 따라 같은 일도 이렇게 달리 느껴진다. 난 이런 걸 증명하는 것이 너무 좋았다. 스스로 겪어봐야 굳이 구태여 남들이 생각하기에 아니하는 것들을 겪어보아야 난 그 감정에 동화될 수 있는 것이었다, 

 

입김이 나온다.

겨울이었다. 같은, 그 같은 겨울이었다. 

 

"워메 날씨는 죽이네"

 

하면서 나서는 설레는 발걸음, 내가 왔다는 사실을 알리가 없는, 아니 내 존재 자체를 알리가 없는 A 일병은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나를 맞이할까. 어떤 장난을 쳐볼까 하는 마음을 갖고 난 오랜만에, 총 6개월 만의 내 근무지였던, 아니 내 근무지인 그곳을 향했다. 

 

 

문을 박차고 들어가

 

나는 외친다 

"야, 나와" 

 

B 일병, 전입 온 지 얼마 안 되는 친구다. 내 존재를 알리가 없다. 훈련소를 마치고 2주간의 보호기간을 끝내고 겨우겨우 이제 와서 경계근무를 서는 일병이랬다. 빡빡 깎은 저 머리를 내 모를 리가 있나, 나도 분명 저리 어리바리하고 상황 돌아가는 것이 급박했는지 모른 채, 앉아 있었겠지, 무엇을 잘 못했는지 모른 채. 

 

그는 나에게 말했다

 

"? 누구십니까" 

 

나는 대답한다 

 

"야 나오라고"

 

B 일병은 일어난다.

"아 예, "

 

주섬 주섬 공부하고 있던 아니, 무언가를 적고 있던 책을 자기 가방 속에 넣으면서 옷을 입기 시작한다. 원래라면 허용되지 않던 행위다. 아니해서는 안 되는 행위였다. 일병이, 전입 온 지 얼마도 되지 않은 일병이 이런 자세를 보인다는 것은 그의 군 앞길이 어떻게 꼬일지 모르고 있다는 것이겠지. 혹은 내 동기, 후임들이 서로서로 편하게 하자고 하는 그 태도가 이런 상황을 만든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이 설레는 감정과 어찌 보면 분노, 아니 아련한 그 마음이었다. 아련한가? 왜 아련한가? 전역자들은 아는 감정이 아니던가. 그가 걱정되었지만 , 이제 내가 상관하면 안 되는 사람. 앞으로 살아갈 인생이 창창한 이제 막 20대의 길의 발걸음을 걷기로 하는 자 아닌가? 

 

이런 속마음을 숨기고 난 다시 말했다. 

이럴 때 필요한 표정은 

어느 정도 화내는 것이 필요하다. 

 

이 X끼보소 ?

 

"어? 어? 쉬 끼마 나오라니까 진짜 나오네 , 경계근무 그렇게 할래?"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B 일병은 말했다. 

 

순간 지었던 그이의 표정

 

"아니"

 

아, 이 당황스러움, 그 혼란하고 멈추지 않는 땀, 행동은 모두 정지된 상태.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오고 갔을고?

생전 보지도 못한 인물이 갑자기 나타나 자리를 나오라고 해서 나왔는데 , 나오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니. 

여기서 다시 한번 몰아쳐주자, 이 경험이 그에게 다른 실수를 예방하게 해주는 좋은 경험이 되게 해 줄 테니,

혹은 나를 싫어할 수도 있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그가 맡은 바 임무를 다 해야 하는 것을 알려줘야 하는 것이 선임자의 의무. 그리고 짧지만 군복 입은 자의 의무 아니겠는가. 

 

나는 또 말했다.

 

"아니?"

 

그는 당황했다. 아니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 이야기를, 이러한 일련의 사건 사고들이 퍼져나가게 된다면 다른 이들에게 남겨질 이미지를, 분명 두려워하는 거겠지. 첫인상이, 그의 앞날의 군대 생활이, 어떻게 될 건지 아니면 내가 누군지 아, 그 표정 난 기억한다. 

 

그리고 나는 말했다.  

"아니야, 가봐, 가서, 보고하고 올라가. 나에게 질문하지 말고, 해봤자 의미 없어, 내가 누군지도 알려고 하지 마, 어차피 몰라도 되는 사람이야." 

 

틀린 말 하나 없는 그 문장 하나하나. 그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단결"

 

난 그의 경례를 받았다. 온갖 잘못된 절차 속에 경례만큼은 제대로 하는구나. 

 

"단결"

 

새벽이다

 

나의 마지막,  군인으로서의 새벽이다.

 

다음날은, 

 

그날의 걱정을 마음속에 안고 살아가겠지.

 

신병이 올 때마다 어떤 신병이 오게 될지 항상 궁금했던 나의 이야기들, 그걸 접어둔다.

 

앞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지게 될지 인지하지 못한 채 나는 내 군대의 이야기를 접어둔다. 

 

 

겨울이었다.


 

 

신병이 들어올때마다 찾아가서 어떤애였는지 물어보던 그 시절
훈련에서 나오는 미군 밥이 맛있던 그 시절
번역하고 있는데 단어 하나 때문에 4시간 5시간 정도 고민하다가 대충 하라고 해서 대충했는데 나중가서 왜 대충했냐고 드럽게 혼났던 그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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