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기에 앞서, 이 글이 어학병의 업무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궁금한 사람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부분은 

어학병 소속 부대의 정확한 위치와 세부적인 편제사항, 내부 시설,

병력현황 등에 대한 모든 내용은 특수 군사 II급비밀로 분류

이러한 사정을 이해해 달라.


이번 편은 정말 쓰고 싶었던 편중하나다, 이게 정말 서러운 마음을 대변해 주는 글이기도 하고 잘못해도 욕먹고 잘해도 욕먹는 번역과 통역의 끝판왕,

 

바로 은유법의 번역과 통역이 되겠다.

 

이 말은 영어속담을 한국어로 100% 번역하거나 혹은 한국어의 속담을 100% 영어로 번역해야 하는 것들이다.

그러니까 우리말로 하면 문화적 이해로 어떤 뜻인지 알아서,

10을 말하면 100을 이해하고, 어찌 보면 그 과정의 어려움 때문에 허탈한 웃음이 나오게 하는 이야기 중 하나인데. 

 

번역과 통역의 관점에서는 이런 복병이 아닌 애들이 없다. 

 

정말 너무 싫다. 아니 싫은걸 넘어서서 가증스럽다.

아무리 언어를 사랑하는 나의 성격이라지만, 이런 천둥벌거숭이 같은 언어의 표현을 어찌 영어로 번역하겠는가?

 

위에 쓴 문장도, 그 마음을 대변하고 있다

"천둥벌거숭이"를 영어로 번역하라고 하라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물론, 번역이나 통역에 앞서서, 같이 들어가는 분에게 부탁을 하옵건대 수사학적인 표현을 해주지 마시고 그냥 사실만 간결히 말씀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을 매번 말했다만, 그 말을 들어주시는 것은 손에 꼽을 정도고 계급도 낮은 내가 맞춰야 하지 않겠는가. 

 

기억에 남는 영어의 표현은

 

"I understand everyone's efforts...... but I still can see the big dinosaur in the files."

모두의 노력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마는, 아직 공룡이 보인다네..

당시 공룡을 찾으셧던 라카메라

라고 번역을 하면, 나의 역할이 끝나겠다만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공룡이 무슨 의미를 하고 있는가 궁금증을 자아낸다

그렇다

 

이 언어적 수사학적 표현방법에서 문화적 차이를 번역하고 통역하는 것도 어학병의 역할,

그래서 어학병을 해외유학을 오랫동안 해온 아이들을 뽑는 이유기이기도 하며

통역장교를 교육하는 데에도 최소 6개월의 국방어학원의 수습기간이 필요한 이유 중 하나랬다,. 

 

다시 돌아와서, 영어에서의 공룡의 표현은 

Dinosaur Definition & Meaning - Merriam-Webster

 

Definition of DINOSAUR

any of a group (Dinosauria) of extinct, often very large, carnivorous or herbivorous archosaurian reptiles that have the hind limbs extending directly beneath the body and include chiefly terrestrial, bipedal or quadrupedal ornithischians (such as ankylosa

www.merriam-webster.com

: : one that is impractically large, out-of-date, or obsolete

오래되어 변하기 힘든 구시대의 잔물등을 지칭할때 "공룡"이라는 표현을 하신 것이다. 분명, 말씀하신 분은 자기 자신의 다양한 수사학적 어휘로 사람들의 마음에 감명을 주고 행동을 할 것을 생각 하신 것일텐데, 이제 통역에겐 충분히 고역이었던 샘이다. 
 

이와 비슷한 일화로, 내가 한국어를 영어로 통역할때 훈련당시에 이야기인데, 

 

 
.... 이러한 훈련의 마지막에 감회가 새롭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가주시길 바랍니다 

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감회가 새롭다는 말을 , 내가 어찌 영어로 통역을 했냐만은

 

"It is such ambivalent feeling at the last day of drill, However, we must focus on our obejectives"
라고통역을 했었다

 

Ambivalent 

 - 좋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싫다고 해야할지 애매모호한 상황을 말하는 단어

감회가 새롭다 

 - 지나간 일을 뒤돌아 보았을 때, 느끼는 그때와 사뭇 다른 감정

 

보이는 것처럼 그 단어의 뜻은 차이가 컸다.

그렇다 번역이라는 입장에서,

통역병이라는 입장에서 평가는 0점.

실패했다

 

하지만, 긍정적인 요소를 생각하자면, 100% 의 뜻이 아니라고 해도 60%는 전달이 되었었고, 어차피 훈련의 마지막을 나타내는 개인적인 사담 같은 것이니 중요하지는 않기도 하지만 역시나 그 문장의 구조 하나하나가 인간미 넘치는 문장 아니한가? 지금도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분명, 그 문장에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만들어낸 문장의 기록이 회의록에 영원히 남아 다른 후임들에게 기록을 넘길 생각을 하면, 감정이 복받쳐 오르곤 한다. 

 

또 다른 통역의 기억으로는, 

 "여러분도 눈이 있으니까 굳이 불필요한 것들을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I do not want to discuss unecessary comments from what we can see now 

 

이것도 100% 정확한 번역과 통역이 아닌데, 그 이유로는 역시 그 문장의 비교를 해보면 첫 한국말의 문장은 "눈으로 볼 수 있는걸 굳이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라는 뜻이 강하고, 영어 번역은 "불필요한 논의를 하고 싶지는 않다"라는 뜻이 된다

 

결과론적으로 보면 같은 말을 전달하고 있는 것은 맞지만, 그 전달 방식에 있어서 번역을 하는 "나"의 표현 방법이 들어가 있는 것이었다. 이 완벽한 번역에 대한 열망과 갈망은 군 생활 내내 남아있었고 지금도 문장을 하나 표현 할 때 어떤 방식이 더욱더 Native스러운지 방법을 찾는데 대다수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물론, 그게 되는 것은 곧 잘없지만 말이다. 정말 안타까운 부분, 그래도 계속해서 다른 사람의 번역을 참고하고 탐구해나 가보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또 다른 서러운 이야기로는 , 이러한 수사법적인 차이 말고도, 업무 진행방식에서 한국군과 미군의 차이는 너무 많아 그 때문에 중간에 있는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 많았는데,  서로 말싸움이 된 상태에서는 중간에 껴서 통역을 하게 되면, 자아 분열이 온 것처럼 나 스스로랑 싸우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았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상황은 미 측과 한 측의

갈등 상황이었는데

 

미 측에서는 한국군 소속인 내가 한국군에게 싫은 소리(미 측이 한 말)를 번역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우물쭈물하는 나에게 

 

Say it, God dam Say it, it is not your voice, it is my voice, and your job is to translate.
Don't give a damn about the afterwards. I will take your cover.

 

즉 , "말해, 가서 너의 상관한테 가서 말해, 너의 역할은 통역이고 그 이후의 일은 신경 쓰지 마,

뭔 일 생기면 내 잘못이니까"라고 소리를 친적이 있으셨다.

물론 매우 감사한 배려심이었지만, 그 어느 부하가 자기 상관에게 싫은 소리를 하겠는가

실제로 통역에게 이렇게까지 소리치는것은 아니지만

 

이 영어를 한국군 장교분께서도 모르시는 것은 아니기에, 그가 답한 것은 

 

" 그래도 말을 그렇게 하면 안 되지"

I cannot help you out even if I can if your-side act like this.

 이런 상황에서 중간에 낀 사람의 마음은 무너지길 마련이다, 그래도 감정을 다잡고, 해야 하는 것이 나의 의무. 물론 마찰이 되는 단어는 빼야 했었다. 그렇게 10분 20분간의 실랑이 속에서 스트레스를 받은 나에게 남겨지는 말은 고생했다는 말은 없고, 서로 감정이 상한 2명의 성인 남성과 중간에 끌려와서 고생하는 통역병 한 명이었다. 

 

이 상황에 대해서 불만을 말하기보다는, 나의 생각과 주장보다 살아있는 번역기로써의 삶이 억울하고 서러웠지만 그래도 그 상황에 대한 불만을 말할 권리는 나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이 나의 의무였고 나의 역할이었으니까. 때론 차라리 전방부대나 아니면 다른 보직에 보내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을 정도였고 너무 힘들어 화장실에서 눈물을 흘리고 생활관으로 돌아가곤 했었다.

 

아무튼, 군대에서 중간만 가라는 이야기는,

통역병의 입장에서는 "중간"에 껴서 "알아서 해"라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 상황이 벌어지고 나면, 그 상황에 있었던 나와 한국군 간부님은 건물 뒤에서 담배 한 개비를 피면서 위로를 해주는 말뿐이었다. 매번 그럴 때마다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부하로써의 위로는 

 

"간부님 마음 이해 못 하는 것 아닙니다, 나라 지키고자 하는 일이 쉽기만 하면 벌써 통일되었겠지요" 

 

하는 말뿐이었고, 비어있는 허울뿐인 말이라고 해도 그 문장을 잘 들어주시고는 했다. 

아직도 밤이 되면, 그의 서러움과 억울한 남은 눈빛이 보이기도 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그의 억울한 표정과 더불어 한 가족의 아버지로서의 책임감 넘치는 표정은 내 마음손 한편에서 남아 있기도 한다. 어디까지나 한-미 동맹이라는 것이 갑-을이 명확한 존재였으니까 

 

군이란 장소는 그런 곳이다

억울해도 말을 하지 못하고

결국엔 나보다도 더 중요한 사람을 챙겨야 하는 장소

 

그렇기에 내가 그 자리에 가게 되었고, 그 자리에서 아무런 일탈 없이 전역한 것이겠지 생각하곤 한다. 그리고 그 시스템과 생각의 방식이 아직 내 마음 속 한편에 남아 있는 것 같다. 

 


 

오늘의 포스팅 마무리는, 군 생활 기간동안 절대적인 진리라고 믿었던 "칼 되니츠"의 어록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군인이란 모름지기 독일이라는 나라가 어떤 체제 하에 있든 조국을 등지려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이 생각하는 체제와 다르다고 해서 조국을 등지는 일은, 자신을 희생하며 봉사하는 독일-프로이센 원칙에 위배되는 일이다.

카를 되니츠

 

 

 

시작하기에 앞서, 이 글이 어학병의 업무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궁금한 사람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부분은 

어학병 소속 부대의 정확한 위치와 세부적인 편제사항, 내부 시설,

병력현황 등에 대한 모든 내용은 특수 군사 II급비밀로 분류

이러한 사정을 이해해 달라.


 

    남자들만 아는 논산의 감성은 아무리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사람에게 말해도,
다른 남자들에게는 쉽게 공감하기는 어렵다.


  모든 것이 어려우며, 심지어 사회에서의 통념자체가 먹히지 않은 곳이며, 꽉 막힌 장소 그렇기에 그 장소, 군대를 다녀온 몇 남성들은, 그곳에서 자신의 생각에 지울 수 없는 얼룩이 남거나 혹은 상처만 남지만 그 인지 없이 생겨버린 상처와 얼룩의 존재를 본인들은 모른 채 살아간다. 그래서 가끔 대한민국이라는 공간에서는 회사를 가거나 아니면 어떤 조직 생활을 하게 될 때.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이 

"군대는 다녀오셨고요?"

라는 말을 하고는 한다. 이 말의 중점은 군대를 다녀왔다는 사실을 확인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조직생활의 시야가 있으며 혹은 어느 정도의 탐탁지 않은 일을 견뎌낼 수 있는 내성이 있냐는 말로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그렇게 들린다.

 

그리고 나에게 있어서 처음 마주한 군대라는 공간은 그런 공간이었다.

논산이라는 공간이 아무리 이전 90년대나 2000년대의 초반의 군대와는 절대 같지 않고

아무리 "좋아졌다"라는 공간이라고 해도
"좋아짐"이라는 것도
결국 상대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여지는 공간이기 때문에

 

이 말은 즉, 어떤 이들에게 "논산"은 모든 것이 쉽고 기억 속에서 위로를 주는 낭만이 넘치는 곳이었겠지만, 어떤 이들에겐 한없이 억압적이고, 폭력적이며 그리고 개성을 용납하지 않은 사회를 살아간 사람들 입장에서는 "사람을 만드는 곳"이라고 느껴지는 곳이기도 한다. 그 "사람"을 만드는 공간이라는 것이, 나에게 있어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매번 의구심을 자아내게 했었다.

 

대한민국에서 "사람"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 그리고 그 "사람"을 만드는 과정이 고작 한 달밖에 안 되는 것이라면

그리고, 군대를 다녀온 남성들이 대한민국의 대다수이라면, 왜 자기 자신들이 겪은 고통을, 다음 세대가 겪길 바라며, 그리고 자신과도 같은 사람을 만들고 싶어 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 한다. 

 

아무튼, 오늘은 그날의 기억을 말하고 싶다. 

군대에 가고 싶어서, 군대를 기쁘게 다녀온 사람의 입장에서는 군대를 가기 싫은 곳이라고 말하는 자들의 마음을 전부 공감하지 못하겠지만

 

육군 어학병(통역병) 복무 이야기

2023년 1월 27일 나는 한미연합사에서 어학병으로 전역을 했다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어디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지, 그리고 어떤 이야기를 내가 말을 할 수 있고, 어떤 이야기를 내가 말할 수

igewaedam630.tistory.com

(관련 포스팅)

그래도 그 마음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설명하자면, 이 말은 마치 인지는 하고 무시하는 것이라면 그런 것인데 

쉽게 말해 이는 마치 불이 켜지는 방에 들어가는 마음과 별 다른 것이 없다. 우리가 밝은 방에 들어갈 때, 방에 빛이 있음을 인지는 하지만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군대에 가기 싫다고 속된 말로 징징 거리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난 그렇게 반응했다.

왜냐하면 군이라는 공간은 나에게 있어서는 다른 공간이니까

국방의 의무는 국민의 신성한 의무니까.

그렇기에

다녀온 사람들을 한 없이 고개 숙여 존중하지만

다녀오지 않은 "사람"을 한 없이 측은지심의 감정으로 보거나

 

혹은 

 

내 생각 속에서 "사람"의 개념을 달리 생각하게 된 것 같다.

 

 

여기서 말하는 측은 지심이라는 공간은, 국방의 의무라는 국민으로써의 신성한 의무를 다하지 못한 사람을 어딘가에 소속되지 못한 사람으로 보았었다. 그래서 군이라는 공간은 그런 곳이다, 사람의 생각을 그렇게 변하게 만든다.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다른 사람의 인생을 바라보는 시야를,

군대라는 창틀에 가둬 군필이냐
군필이 아니냐 하는 색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한다.

지극히 이분법 적인 사고, 사람이라면 누구던지 안 한 적이 없고 가장 거리를 두어야 하는 사고, 그리고 사람을 병들게 하며 혹은 세상 살아가는 것을 쉽게 만들어주는 사고. 그래도 한 가지 장점은 있었는데 삶을 단순하게 만들어 주니까

결국에는 군대를 다녀왔다는 이야기로 남자들은 쉽게 친구가 되고 쉽게 하나되고 그 고통을 이해하니까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친구는 나에게

 

한때, 내 친구는 나에게 나지막이 말한 적이 있다

 

그는 군대를 다녀오지 않았으며, 법원에서 4급 대체복무를 하였다. 

그의 말을 들었을 때는 나는 22살 미필의 시야였었고, 

그는 그의 대체 복무를 하면서 나에게 하소연 아닌 하소연을 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아무튼 그가 나에게 해준 말은 간단했다.

 

대한민국이라는 공간은, 군대의 PTSD를 가진 사람들이
서로서로 치료받기 위해 회사나 다른 공간을 만들어 다니는 것 같다고

 

 

그의 말을 나는 그저 사람들이 가고 싶지 않은 장소에 가는 것을 단순히 PTSD라는 단어를 이용해 묘사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그땐 그랬다.

 

하지만, 나는 그이의 생각을 너무 얕게 생각한 거였다.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이 말의 깊이는 굉장히 깊었던 것 같다.

 

어렸을 때 겪는 처음의 조직문화가 군대의 조직문화였고

그 군대의 조직문화는 대한민국 사회에 뼈 깊이 새겨져 있다고

이 사회의 모습이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는 나는 잘 모르겠다

 

조선이 독립을 찾고 임시정부를 만들어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어 갔을 때. 

그 시작을 군대로 시작해서?

 

아니면,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내려온 이후로 9대 대통령까지 한 사람이 군대의 관점으로 대한민국을 이끌어 나갔기 때문에? 

사회 발전의 뒤에는, 수많이 언급되지 않고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이 있겠지

 

아니면 오랜 그 이후, 스스로의 사조직을 앞 세워 다른 사람의 열망들을 짓밟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전 아무것도 모릅니다 판사님

 

그리고 이러한 생각의 끝의 귀결은 내 고통을 내 다음세대에게 넘겨주고 싶지 않음

 

내가 배운 가르침들을 스스로 한번 겪어보면서 배우길 원한다 하는 생각들이 매번 있다.

이러한 두 가지 생각의 차이와 의견의 충돌이 나로 하여금 끝없는 생각을 하게 한다. 당장은 답이 나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지만, 그 생각의 끝에는 언젠가 정답이 있지 않을까 의구심과 혹은 두가지 선택에 갈림길에서 올바른 길로 이끌어나가게 할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들 뿐이다. 또한 이런 생각의 과정을 나만 했다고 난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누구라도 이 일련의 생각의 과정을 자식을 키우는 남자라면 안 하지 않았을 테니까. 왜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된 것이라면 간단하다, 부모 되는 입장인 사람이면 자식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바라기 때문이라고 난 생각한다. 아직 부모가 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지금은 호주에 유학을 다녀온 사람이고, 그런 외부의 시야로 세상을 보는 것이기에 이런 시야를 갖게 된 나도, 생각이 많아지곤 한다. 어찌 보면 이 생각의 과정을 거치면, 나 자신이 한국을 벗어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도 그래도, 난 나 자신이 한국인인걸 부정할 수는 없다. 아니면 내가 그렇게 되고 싶었는 건지 아니면 그 변화를 두려워하는 것인지는 모른다. 

 

 

논산의 기억, 사람이 그리우면서도 장소는 그립지 않은 그 장소, 모든 것이 시작되는 그 장소, 논산

 

딸기로 유명한 장소라고 나는 알고 있지만, 막상 실제로는 딸기보다는 소똥의 냄새가 더 나며 훈련소에서 창밖으로 보이는 아파트단지의 모습인 사회의 모습과 위로 넘어갈 수 없는 벽, 그리고 혹여나 넘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만든 철조망들, 해외의 군사기지는 밖에서의 공격을 방해하기 위해서 그 벽을 치고 요새화를 하겠지만 한국 논산훈련소의 배치도는 오랜 역사를 자랑했기에 밖에서의 공격보다는, 안에서의 탈출을 막기 위해 구조화된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한다.

 

하루의 시간이, 평소에 겪는 하루보다 2배 이상 느리며 그리고 옆에 있는 동기가, 처음 보는 동기가 나중 가서는 가족보다 소중해 보이는 그 장소 그곳이 논산이었다. 20살 초반의 어린아이들이,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찾아오게 되거나 혹은 자기가 해야 할 것을 모르기 때문에 찾아오는 장소. 다양한 인생의 이야기를 가진 이들을 공장에서 몰딩해 찍어내듯이 다른 맞물리지 않는 이들을 맞물리게 만든다.

 

그러니, 당연히도, 적응을 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생길 수밖에

 

나는 군대가 재밌었다, 아니 재밌었다고 하면 좀 그러니, 즐거웠었다. 내 부대는 2x연대 3소대였었는데, 3소대 4소대의 생활관의 분위기는 누군가 국경선을 그어놨을 것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 이는 소대장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는데, 우리 소대장은 특전사(특수전사령부) 출신의 특수임무 훈련을 받은 중사 분이었었고, 옆소대의 소대장은 전역을 언젠가 기필코 하고야 말겠다는 말년 중사. 매번 고양된 목소리로 "응~ 안녀어엉" 하는 그의 목소리는 아직도 기억한다. 

 

정말, 달랐기에, 난 4소대가 부러우면서도, 3소대 소속으로써의 자부심이 있었다. 우리 소대는 특히 애들끼리 떠드는 것을 좋아했었는데, 조용한 걸 싫어하는 나는 하여금 그 분위기를 너무 사랑했기도 했으며 그 분위기를 만들게 하고는 있었다. 

곧 잘 이 때문에 마찰이 생기기도 하였는데, 그래도 물리적인 마찰은 없었으니, 한 달 동안의 분위기치고는 재밌게 논 정도. 

 

물론 너무 나서는 내 성격 탓도 있긴 했지만, 상관없었다. 그저 나는 지나가는 장소로만 생각했었으니까. 마치 오랫동안 타야 하는 고속버스를 타는 감정으로, 버스 안에 사람이 누가 타던 친해지겠다는 개념은 없었으니까. 어쩌다 보니 아까 말했던 4소대 소대장과 이름도 공유하고 친해진 적이 있는데, 하시는 말씀으로는 자기 와이프의 성씨가 내 성씨하고 같아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잘해주는 것도 있다고 말씀을 해주신 것은 있었다. 

 

물론,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고,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중사님은, "X까 이 새꺄" 하는 말로 웃으며 넘기고는 했으니까. 그런 그에게 난 수많은 훈련병들 중 하나였고 그렇게 중요하지 않으며 지나가는 일반 병사인지 혹은 병 x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군에가면 무조건 한명쯤 있는 사람

아무튼 그런 그에게 내 훈련소 이름표를 남겨주고 싶었는데,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고, 아니 오히려 사람을 너무 계속해서 만나고 헤어지기 때문에 본인의 임무에 집중해야 하니 또 다른 사사로운 정을 두지 않는 사람인 것 같았다. 

 

어차피 헤어질 애들인데, 굳이 정 주지 말자 

 

훈련소에서 오랜 군생활을 하다 보면 온갖 인간 군상을 만나게 되고, 그 온갖 인간 군상에서 나는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었을 테니. 이런 마인드가 조금은 섭섭하지만 그래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런 공간임을 나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기억에 남는, 목소리에서 쉰소리가 나는 원사분, 쉰소리란, 정말 목에 파이프를 넣어 소리가 빠지면서 나아가는 것인지 하는 생각이 드는 분이었는데, 병사의 선물을 하나하나 헤아려주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고 하면 생각이 많이 든다.

이들은 아버지 같으신 분들, 전쟁이 나면 본인의 사명감으로 전장으로 나가겠지만 그와 동시에 어린 병사들을 사지로 내몰고 싶지 않아 하는 그의 얼굴은 표정에서 잘 보였었다.

 

고작 표정만 보고 뭘 알 수 있느냐 하겠다마는,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사람의 태도와 어투에서 나오는 배려심이 넘치는 사람. 그 연륜 속에 분노를 절제할 줄도 아는 사람. 그런 원사분이 이었다.

목소리 좀 웃겨요

모든 것을 수리할 줄도 알며, 그저 쇳덩어리만 보면 머릿속에 있는 것도 손쉽게 만들어 내는 그런 사람, 이런 사람의 차갑지만 속에 박힌 따뜻함은 아직도 기억의 저편에서 매일 아침 나에게 야단을 내곤 하신다

 

훈련소 조교, 훈련병은 사실상 없는 계급이라, 이 훈련병들을 담당하는 훈련소 조교들의 계급은 보통 일병~상병 혹은 가짜계급장으로 하사~ 중사의 포지션을 맡고 있는데 이들의 이야기를 잊을 수가 있나.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전역하고도 만난 사람이고, 아직까지도 연락을 하고 있긴 하다.

 

그들의 이야기는 나중에 생각이 날 때, 다시 한번 하겠다.

그 육교를 기억하시나요

 

 

그리고 이 글의 제목인, 거꾸로 가는 열차 고작 4주간의 훈련, 길고도 짧은 논산의 한 달을 버틴 훈련소에서 나와 가는 자대 배치. 이 글을 읽는 군필자라면 첫 자대배치 감정이 어떤 감정이 드는지는 묘사를 하지 않아도 알고 있을 것이라고 난 생각한다. 정이라면 정이든 나의 훈련소 동기들을 뒤로하고 나아가는 평생 동기들의 장소

"자대"

 

난 자대를 이미 사령부로 배치를 명 받았기 때문에,

그 때문에 설레는 마음이 넘쳐났었다. 내 인생에 있어서, 두 번째로 즐거운 날이었으니까. 

 

 

참으로도 역설적인 부분은, 군 생활을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관점에서 자대로 가는 열차가, 뒤로 간다는 점이었다. 

이는 나로 하여금 여러 생각을 들게 하였었는데,  군이라는 공간 속에서 "자대"로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자리가, 뒤로 간다는 점은 이 감회를 새롭게 하였는데, 이는 훈련소의 진전이, 자대에서는 딱히 의미가 없는 행위로 변질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즉 훈련소에서 내가 성취한 "앞"이라는 개념이, 자대에서는 "특별한" 행위 자체가 아닐 테니까. 왜냐하면, 내가 가는 모든 이들이 훈련소를 수료했었으니까. 

 

즉, 이 한 달의 기간이 무의미한 일인 것.  

 

물론, 사회의 관점에서는 굉장히 유의미한 경험이었겠지만 훈련소 수료라는 것이 당연한 관점에서는 나의 한 달이라는 고난과 고생이 그렇게 특별할 게 없는 경험이었던 것. 

 

물론 자랑스러워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고작 한 줄의 계급장이었지만.

내 기준에서는 그 계급장의 크기는 크게 느껴졌으니까.

반짝반짝


아무튼, 이러한 생각을 뒤로하고, 어학병으로써의 삶을 시작하는건 나중에 이야기 하도록하겠다. 

 

 

시작하기에 앞서, 이 글이 어학병의 업무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궁금한 사람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부분은 

어학병 소속 부대의 정확한 위치와 세부적인 편제사항, 내부 시설,

병력현황 등에 대한 모든 내용은 특수 군사 II급비밀로 분류

이러한 사정을 이해해달라.

 


북한은 상도덕을 모르는 새끼들이라서 그런지, 주말마다 미사일을 쏘았는데, 그리되면 주말 당직을 서는 분들도 피곤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군은 그 조직의 특성상 24시간 동안 적의 동태를 파악해야 했고, 그들의 특이 움직임은 우리에게 있어서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으니까. 

 

마음 같아서는 서로 서로 편하게 좀, 주말이나 아니면 행사하는 날이나 쉬는 날에는 공격하지 않았으면 하는데

이 x끼들은 그런 날이면 오히려 머릿속으로는 "야 우리가 이때 공격하면 저 새끼들 X 같겠지" 하는 매뉴얼이 있나?

싶은 합리적인 의심이 들정도로 X랄 아닌 X랄 한다. 

어 ~ 주말이야~ 쏠거야~

 이는 간부/병사로 하여금 주말 출근을 하게 하며, 하루하루 훈련으로 고되게 아니 그냥 하루일과를 보내고 나서 따스하게 마음의 힐링을 찾고자 하는 자들에게 마음에 불을 지필뿐만 아니라 서로 불편한, 정도에 따라 높으신 분들도 나오셔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물론 그것은 그들의 자리가 만든 책임이자 의무이며, 그 직책의 걸맞은 행동임은 틀림없지만, 그래도 이 상황을 맞닥뜨리게 하는 명분을 주는 새끼가 X 같은 것은 어쩔 수 없다.

화성 15호 발사

 

화성 5호 발사

 이 글을 보고 있는 군 관련자들은 필히 공감을 하겠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군대에 다녀오지 않으신 여성분들이나 혹은 대체복무자들에게 비유를 들어서 설명하면, 당신이 일하고 있는 자리에, 당신만이 담당할 수 있는 일들이 당신의 쉬는 시간을 노려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범인을 특정할 수 없는 것었다면 그냥 오늘 하루 똥 밟았다 싶어 하루를 어쩔 수 없이 보낸다면, 이 군생활의 주적은 확실하다.

발사체 (X랄)

그렇다, 그 새끼다

 

아무튼, 2022년은 그런 한해였다. 주말마다 미사일 쏴재껴 진짜 짜증 나게, 어학병이 주말에 미사일 쏘는 거랑 무슨 상관이냐고 싶겠지만, 우리는 한미 동맹. 70년 동안 서로를 지켜낸 동맹,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이 서로 간의 관계 속에서는 언어로 소통해야 하기 때문에, 걸어 다니는 파파고인 우리는 군복을 입고, 우리의 위치로 향해야 한다.

 

2022년 5월에는 우리도 대응 사격을 하겠다고, 그 울분을 쏟아내었었던 것도 얼마 되지도 않았었는데

 

이 11월 12월의 기억은 매우 강렬한데, 눈 쌓인 부대의 사이사이로, 현 위치로 복귀하는 것은 그 감성만큼은 잊을 수가 없다. 새벽의 차량의 불빛이 어둠길을 갈라내고 제설 작전을 진행하고 있는 후임들 사이로, 크리스마스의 분위기를 타려고 하는 미군들 사이에서 그 즐거움이 고양되어 있었을 즈음에, 

 

이 X발련은 이 분위기에 초대받지 않았다는 것에 꼬장을 부리는 것인지, 아니면

"하하 나도 유학생이었던 적이 있어서 서양애들은  지금이 딱 적기야 지금 때려야 해"

(김정은은 스위스에서 유학을 했었다)

하는 마음으로 버튼을 누른 게 틀림없다. 

야발련

 

그 의도가 어찌하던, 그들의 핵무장을 향한 발걸음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던, 우리의 하루를 망쳐버린 것을 의도했다면 매우 효과적으로 작용은 했다. 덕분에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좋아하는 주한미군도 그런 "군기강해이'의 형태를 보여주지 않았으니까. (물론, 군대도 사람 사는 곳이라고 생각해서 난 기강해이라고 보다는 지친 하루의 위로라고 생각한다)

 

 국가 간의 선은 상대 쪽에서 계속해서 넘어왔었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런 대응하지도 못했었는데 이는 서로의 위치와 입장이 달랐기 때문이다. 우리는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외교를 정상국가스럽게 대처해야 하는 다양한 이해관계에 얽혀있었고, 북한은 그런 이해관계를 신경도 안 쓰는 것으로 유명했으니까. 하물며 공식적인 TV방송을 이웃국가인 일본을 "파렴치한" 혹은 "역적패당"이라고 부르는 자들에게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훗일 생각 안 하고 자기 마음대로 외교를 하는 곳이 북한이라는 곳이니까

 

단어 선택하고는 참..

 

 우리도 참을 만큼 참았다, 대응사격을 하겠다고 하였지만, 그때 당시에는 워낙 대응을 하고 싶어도 하지는 못했다. 평화합의라고 한 것으로 우리의 팔이 묶여 비유를 하자면 앞마당에서 불장난을 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두어야 하는 모습만 연출되고 있었다. 물론 지금이야 (작성시기 2024년) 상황이 다르지만, 그때 당시에는 그랬다. 그러한 복잡한 내부에 사정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이 직접적으로 표출을 하지는 못하고 간접적으로 미국 측에서 움직여 주길 기대해야 하는, 은연중에 말을 해주면서 눈치껏 그들이 받아들여주길 원하는 이야기들이 많았으니까.

 

미국도 한국과 수교를 하고 외교를 하고 동맹으로서 역할을 오랫동안 해왔기 때문에 그 속사정을 알고 있는 건 있긴 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미국과 간접적으로 돌려 말해야 하는 한국의 업무방식의 차이 속에서 생기는 감정적 마찰은 통역을 하는 사람에게 달려있는 것이니 스트레스는 안 받고 싶어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 가지 기억하는 사건은 2022년에 발생한 북한 무인기의 침범 사건, 서울 하늘을 쓰윽 살펴간 이 사건, 덕분에 미 측에서도 "당했다"라는 반응을 보여줬었으니까. 물론 내가 기억하는 그 "당했다"라는 것은, 돌려보냈다는 그 "당했다"였던 거 같다.  한동안 언론에서도 시끄러웠었고, 늦장대응이다 뭐다 하면서 대한민국 언론이 분열을 의도했는지는 모르지만 떠들썩했으니까

 

출처:동아일보

 

. 이러한 이야기 끝에 결국에는 우리도 대응을 똑같이 했었는데, 

 

그렇게 하면 "야 너도 그러면 똑같은 놈이 되는 거야" 이런 말을 할 수 도 있긴 하다. 하지만 옆집이 외교를 정상적인 국가처럼 하는 곳도 아니며 미치광이 전술로 간을 보면서 끝까지 신경을 긁고 가는 국가이기 때문에 그에 걸맞은 대응을 해줘야 하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방법이, 유엔 측에서는 이런 결과를 낳긴 하였지만 말이다 

 

 

유엔사 "무인기 보낸 北·맞대응한 南, 둘다 정전협정 위반" | 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하채림 기자 = 유엔군사령부는 지난달 26일 북한 무인기의 남한 영공 침투와 그에 맞대응해 무인기를 북한으로 보낸 남한의 군사...

www.yna.co.kr

 

그들 또한 그들의 입지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은 이해한다. 조금 아쉬운 마음은, 당하는 사람의 입장도 고려해주지 못하는 중립적인 유엔의 태도였겠지만 그래도 그게 잘못되었다고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저 아직도 그 바빴던 날들을 난 기억 한다,

 

잊을 수가 있나. 지극히 악의적인 개 X 끼들, 덕분에 한동안 주말출근은 기본이었으니까. 

 

뭐 혹자들은 북한이 한국의 담당일진 역할을 톡톡히 했다고 하는 시야도 있긴 하다, 한국의 약점을 일부러 공격해 우리가 보완해야 할 부분을 1대 1 과외로 알려주고 있다고, 놀라운 시야지만, 그렇게 보일 정도로 이 무인기 대응은 우리가 할 말이 없을 정도였으니까. 

 

이제 나는 전역자의 시야로 군을 보고, 또한 동시에 북한을 바라보고 있다. 작금의 상황인 남북관계는 평화의 노선을 가고 있는 그림이 아니라 서로 간의  화구를 맞대어 네가 쏘면 내가 쏘겠다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것은 지극히 유감임과 동시에, 내 또래와 그리고 미래에 군에서 살아가야 하는 내 동생들 그리고 미래에 혹시 모르는 내 아들들을 생각하면 만감이 교차한다.

 

분명 나도 어렸을 적에,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주말에 놀토를 그리워하던 그 시절에, 군인들에게 위문편지를 쓰는 행사를 했었고 그리고 그 편지에는 이후에 한반도가 통일되어 군대 갈 일이 없을 것이라고 믿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 일은 생기지 않지 않았던가. 

 

1년 6개월의 군생활을 길다면 길고 짧게 했지만, 그 짧은 군 생활은 변화의 시기였기 때문에, 2018년에서 2022년의 정권 이양의 시기를 직접 겪었으니까, 군대 내부에서도 분위기가 바뀌어 나가는 것을 직접 체감했었으니까. 이제 나는 전역을 했고, 사회에서의 역할과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하는 자리에 있는 상태로 내 경험과 내 기억을 갖고 이제 군에 들어가는 동생들을 보면, 마음 한편이 아련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다는 것이, 어찌 보면 영광스럽고 명예스러워해야 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한 없이 당연해졌고, 다른 나라 사람들 입장에선 선택이었던 것이 희생의 강요를 처음 겪는 장소가 바로 군이라는 공간이니까. 내가 겪은 발자취를 내 동생들과 후임들이 당장 따라갈 것은 아니지만, 그 감정과 그 장소에 대한 이해는 공감하고 있다. 그러니 마음 한편에서는 더 잘해주고 싶은 감정만 벅차오를 수밖에 없다. 

 

이 감정의 기원이, 사회의 시스템 때문이고, 그 시스템의 출발은 그 X발련 때문인데 

 

 

덕분에 20대 초반에 성숙해지는 계기를 얻어갈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나 스스로가 실수를 하는 것이 발생하면, 책임 소재에 대한 교훈을 배울 수 있는 (강제) 곳이 군대만큼 좋은 곳이 없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 할 수 있다면 안 하는 게 훨나은 그곳,

그런데 이 장소를 겪게 만드는 게 그 새끼

 

분명 이 글도, 북에서 읽고 있다면 내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데, 주체고 X랄이고 너네들이 주말이라는 것도 없고 휴일도 없이 착취당하는 꼬장을 왜 우리한테 부리는지 모르겠다. 그 꼬장의 대상은 우리가 아니라 너네 윗사람한테 가서 부릴 것이지. 정말 짜증 나는 족속들

 

 

십새기

아무튼, 이 글을 읽을 나의 동생들과, 내 후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또 달리 하는데, 그 메시지는 간단히 


 

"원래 그런 장소니까 버티고 그래도  자기 자신을 잃지 말아 달라"


이상, 오늘의 기억 주저리는

?

어학병은 무슨 일을 하나요?


 걸어다니는 파파고, 사무실에서 부르면 어디에 있던지 간에 나타나 자기가 원하는 말을 영어로 번역하고 통역하고 그리고 사라지는 존재,  개구리 중사 케로로에 나오는 집사 캐릭터를 알고 있는가? 그런 역할이다. 그냥 언제든지 귀를 열고 있다가,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나 통역과 번역과 기타 잡무를 해결하고 그리고 어디에 뭐가 있는지 말씀드리고 그 유관정보를 보좌하고 말동무도 해주고 항상 옆에서 펜과 종이를 들고 다니면서 번역일을 하고 영어를 알려드리며 또한 자대로 퇴근하면 다시 자대에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리고 어학병이 또 소속된 부서에 따라 일이 다른것도 있고, 더 자세히 말하면 기밀 사항이라 말을 해줄 수는 없다. 그냥 대충 비서+통역+번역+잡무, 동시에 공식적인 사진이 아닌 이상 일반 병사라서, 딱히 힘도 없고 그저 그런 보좌진 밑에 있는 보좌진의 역할. 시키는 일에 질문하지 않는 것을 알고, 위에서 시키는 의도를 알고 조용히 수행만 하는 존재였던 것 같다.  군대에서 사랑받는 사람이란 본래 그런 것이니까. (주말 출근을 좋아하니)

또한 계급이 높아질수록 일이 더 많아진다, 이는 업무의 구조 자체가 그런 구조이기 때문에, 이병 일병은 일 배우느라 바쁘고, 상병 병장이 되면 일을 쉽게 쉽게 수월하게 해결하기 때문에 위로 올라갈수록 일이 많아지는 형태가 되기 때문.

 

이 두개를 합치면 된다

 
 

명문대 출신들만 어학병에 가는거 아니에요?

 

 명문대 출신인 아이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뿐만 아니라 KAIST 혹은 해외 명문 Ivy league 대학교 학생부터 시작해서 영국의 사립대학교도 많이 보이고, 또한 어떤 이들은 이미 미국에서 10년 동안 이상 거주한 경험을 갖고 군대에 찾아와, 그들의 의무를 다한다.

하지만, 그것은 다수의 이야기이며, 나와 같이 일반 지방 거점 국립대를 다닌 5수생 인생 망했다 인 삶을 살았던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학력에 졸지 마라, 나는 내 친구들이 이런 말을 할 때마다,

 

나를 위로해 주겠다고 해준 말은, 
"야 너는 전라도에서 유학한, 전북대학생이야. 쫄지마. 어차피 그 실력은 남아있으니까 그리고 반대로 생각해 보면 너의 실력이 그들과 비슷하기 때문에 같은 자리에 서서 통역의 일을 할 수 있는 거니까 말이야."

이러한 멍청한 이야기고, 말도 안되는 이야기고 어찌 보면 지역차별로 보이는 그 말 하나하나 이지만, 그가 말한 것에 틀린 것은 없었다. 민X고 라던지, 아니면 일반 사립고등학교에서 상위권을 유지하면서 혹은 해외대학교에서 유학을 하면서 삶을 살아간 아이들이 군대에 왔다고 해서 내 실력이 꿇릴 것이 있다는 것은 아니니까.

그러니, 이러한 나도 어학병에 통과하여 좋은 군생활을 했기에 걱정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또한 명문대학교 라고 해서 그들이 당신을 무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성검사가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연합사에서 만난아이들 대다수는 마음씨가 선하고 올바르고 그른 것을 구분할 줄 아는 애들이었으니까.

자기만 생각하고 이기적으로만 굴지 않으면 된다

. 스스로의 학력을 너무 생각하지는 말아라. 대학이 성공을 보장하지도 않으니까

오르비에서 주워온 대학랭킹, 나이가 들어서 보니 대학보다는 인성이 더 중요하더라

학과가 다른데요? (한약)

 이건 앞서 말한것의 연장선인데, 해외 유학의 경험과 점수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학과가 중요한 것도 아니다, 가보면 어학병이 영어 어문계열의 병사보다는 영어를 그냥 원래 잘했고 본래의 전공은 다른 걸 하는 애들도 많다. 의대생도 있고 약대생애들도 있고 공학계열인 애들도 꽤나 있다, 그냥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기 위해 영어를 한 케이스라서, 그렇게 영어에 너무 신경 쓰지.... 는 말아달라. 어차피 어학병을 고민하는 당신이라면, 주변에서 자기가 영어를 잘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겠는데. 토익은 어차피 기본으로 900 이상 애들이 더 많으니까 
(전역하자마자 자퇴하고 해외대학으로 유학감)

면접을 어떻게 통과했나요?
 면접은 XXX통역학원에서 시키는 기억훈련법만 통과해도, 절반이상은 먹고 들어가는 것 같다. 통역은 기억의 싸움이지, 영어의 퀄리티의 싸움은,  통역장교가 하지 않나 싶다. 물론, 기억도 좋고 퀄리티도 좋다면  할줄 안다면 당신이 맞겠지 그럼 어학병으로 하지 말고 통역장교를 지원해라. 그게 더 남는 장사니까. 정말로.. 

통역장교하세요 그럼

훈련소는 어떻게 생활했나요?
어학병은 통과가 되면, 4주간의 훈련소 생활을 논산에서 하게된다. 물론 이미 어학병이라는 점에서 자대 배치는 대다수 사령부로 갈 것이지만, 그래도 훈련소의 평가가 안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만약에 당신이 "나 훈련소만 대충 받아도 어차피 사령부 가니까 상관없을 거야."라는 생각을 한다면, 당신은 이 군대라는 좋은 경험과 기회를 이용하지 않겠다는 건데, 그런 마음가짐으로 군 생활을 올바르게 할 수 있으련가.
평가는 이미 논산훈련소에 들어가게 된 그때부터 시작되어 있으니까.
훈련소 생활을 착실하게 해라.
라는 게 훈련소에서 친해진 조교/중사님 피셜

 

같은 조건이면 카투사가 더 좋지 않아요?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솔직히 밖에 우리는 소속이 소속이라 못 나가는데 걔네들은 KATUSA, Korean Augmentee to US Army라서 미군 통제를 받아, 밖에 나가는 거 볼 때마다 부러워 죽음, 이 글을 찾아 떠내려온 당신에게는 카투사가 떨어졌을 것이니, 그렇기에 실력이 있다면 통역장교를 하라고 하는 말을 하는 것이다.

내보내줘 어학병

그래도 어학병은 국방부 오피셜 작은 외교관이라는 것이라고 불리는 것에 걸맞게 많은 의전을 받기도 한다. (사실은 의전의 주인공은 어학병이 아니지만) 의전의 주인공까지는 아니더라도 곁에서 떨어지는 음식들도 있기 때문에 나쁘지는 않다.

작은 외교관이라는 것은 사실이니까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이 카드 뉴스가 틀린 소리가 아니다, 국방부라고 해서 입대하는 군인입장에서는 다르게 들릴 수 있는 것은 사실인데, 적어도 이 카드뉴스들은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는 것 있다. 언어를 할 줄 안다는 것 + 실력을 쌓을 수 있다는 것 = 은 많이 남는 장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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