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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 1편

@Salieri2026. 2. 26. 23:04

혹자들은 말한다, "사실"만이 사람을 정하는 것이요. 정해진 그 사람의 의도보다 중요한 것은 Fact라고. 

 

하지만 나는 의문을 던진다. 내가 믿는 "사실" 또한, 관점에따라 변화하고 변동적인 것이며, 법률 또한,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기에, 당장에 일어난 "사실"을 보고 이성적인 판단을 하고, 잘라내야 할 사람을 잘라내고 붙여내야 할 사람을 붙여야 하는 것은, 그것은 어디까지나 "돈"과 관련된 것이요. 인간 "관계"에 있어서는, 당장의 일어난 사실 보다 그 사람의 관점점과 시야를 들어줘야 한다는 것을.

 

그러나 우리가 살다가보면, 내가 믿는 "사실" 적 가치가. 항상 "올바르게" 해결 방법을 제안한 적이 없었고.

내가 간곡히 부탁했던 것들도,

듣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판단이 달라지는 것을 보았다. 

 


 

서문 

 

살다 보니 내가 굳게 믿었던 ‘사실적 가치’가 늘 올바른 해답을 쥐여주지는 않았다. 내가 간절히 부탁했던 진심조차 그것을 듣는 이가 누구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판가름 나는 것을 숱하게 목도해 왔다. 그렇기에 지금의 나에게 인간관계 속의 ‘Fact’란 더 이상 절대적인 무언가가 아니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내 심연에 자리 잡은 한 사람에 대한 기억을 기록하고자 한다. 이 이야기를 꺼내려면 시간을 5년 전인 2021년, 더 나아가 우리가 처음 얽히기 시작했던 2018년으로 되돌려야 한다. 나는 그 시절, 내 평생 결코 마주치지 않을 것 같았던 부류의 사람을 만났다. 우리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같은 관계 속으로 빠져들었고, 그는 거친 파도 속에서 살아남는 생존법을 내게 가르쳐 주었다. 비록 그 끝에 이르러서는 내가 직접 그 관계의 숨통을 끊어내야만 했지만, 내 기억 속의 그는 참으로 ‘악(惡)’하면서도 동시에 지극히 ‘선(善)’한 사람이었다.

 

이 이야기의 진정한 서막은 2021년에서 출발한다. 당시 스물다섯의 나는 여전히 ‘대학생’이라는 유예된 신분 안에 머물러 있었고, 나의 가치관이 내 삶을 지탱할 보편적 기준이 되지 못한다는 깊은 정서적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를 이끌어 줄, 흔들리는 내 발걸음을 완성해 줄 강력한 ‘초인’을 갈망했다. 대학이란 곳에 발을 들였으나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공부”는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고, 나의 주체적인 판단은 늘 외부의 요인들에 의해 이리저리 휩쓸렸다. 수동적인 공부, 수동적인 학습, 그리고 수동적인 사유. 당시 내게 관계의 중심이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주도적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를 바라보는 타인들의 감상과 평가’를 예민하게 의식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꽃을 볼 때조차, 내가 꽃을 주체적으로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꽃이 나를 바라보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수동적인 관점에 갇혀 있었다. 내 생각의 방향성은 전체적인 큰 그림을 조망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나의 편협한 세계관 속으로 억지로 끌고 들어오는 식이었다.

 

이토록 수동적이고 닫혀 있던 나를 송두리째 바꿔 놓은 것은, 내 인생의 궤도를 비틀어버린 그 사람을 만나고 나서부터였다.

 

본문

이야기를 더 이어가기 전,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것이 있다.
나는 지금도 그를 깊이 존중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를 심히 우려한다.
그가 아직도 나를 ‘좋아하고 있는지’,
혹은 내가 여전히 그를 ‘잊지 못하고 있는지’와 같은 얄팍한 감정의 잔재와는 별개의 문제다.

 

그는 나와 동갑이었다. 하지만 나와는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다.

그는 스스로 사유할 줄 알았고, 그의 확고한 자아가 그의 모든 행동을 당당히 대변하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그를 잊지 못한다. 그에게는 그만의 확고한 ‘선의 관점’과 흔들림 없는 ‘도덕적 기준’이 있었다.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란 내 잣대로 보아도, 그는 지나칠 정도로 보수적인 시야를 가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내가 진정으로 좋아했던 것은 그의 보수성이 아니라, 그가 묵묵히 나아가고자 하는 삶의 굳건한 ‘방향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그와, 그의 친구들이 머무는 세계로 발을 들였다.

 

그 세계는 내 인생의 크나큰 위로였고, 나에게 진정한 ‘행복’의 가치가 무엇인지 일깨워주는 선명한 나침반이 되었다.

 

그렇다. 그는 자기 주변의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의 사랑과 애정표현은 때론 기꺼이 우스꽝스러운 광대가 되어 곁을 지키는 헌신적인 방식이었다. 자신의 당장 앞선 감정이나 목표보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의 환한 웃음을 더 가치 있게 여겼다. 자신이 어떤 망가진 모습이 되더라도 곁에 있는 사람이 웃을 수만 있다면 아낌없이 자신을 내던졌고, 우리가 가야 할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을 명확히 짚어주었다.

 

하지만 비극은 늘 가장 빛나는 곳에서 잉태되는 법이다. 문제는 바로 그 지점에서 발생했다.

 

그의 그 확고한 ‘올바름’의 지표가, 어느 순간 타인을 가차 없이 평가하고 재단하는 ‘절대적 척도’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그 성향은 너무나도 강렬하고 압도적이었다. 물론 나 역시 누군가를 판단하는 나만의 기준이 있고 그것이 나를 구성하는 큰 부분임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의 잣대는 타인이 숨 쉴 틈조차 허락하지 않을 만큼 숨 막히는 것이었다.

 

나는 이 답답한 사실을, 내가 믿고 의지하던 또 다른 지인에게 진중하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 단지 내 마음을 위로받고자 함이 아니었다. 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나의 이 깊은 우려가 어떻게든 돌고 돌아 그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는 간절함뿐이었다. 동시에, 그가 내 이야기를 전해 듣고서도 본질적인 자신의 고유한 모습을 크게 잃지는 않기를 바랐다. 나는 그의 그 철저한 모습까지도 사랑했기에, 내가 진정 원했던 것은 그의 표면적인 행동 변화가 아니었다.

 

그의 굳건한 ‘생각의 알고리즘’ 그 깊은 곳에, 나의 작은 관점 하나를 조용히 심어 두고 싶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그가 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그 생각의 근간이 이전보다는 조금 더 유연해져서, 그가 스스로를 갉아먹지 않는 조금 더 따뜻한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기 때문이다. 또한 나 스스로가 , 그를 바꾸는 것 자체가 오만의 행동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또다시 배신 당했다

아니, 내 믿음이 크게 져버렸다

 

내 생각의 배려와, 우려와, 근심은, 협박으로 돌아왔다. 
나의 가족을 위협하면서, 교우관계까지 조종하려고 했다.
나는 그런 것들을 원하지 않았다
반대로 그는 나의 이야기를 듣고, 내 마음에 공감하기보다는, 자신의 관점을 더 굳히게 하는 길을 가게 된 것이다.

 

배신감이었다

 

내가 사랑했던 그의 모습은, 자신의 사람을 지키려고 했던 그의 마음은, 그 칼과 총알의 방향을 자신의 내부에 조준하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지 못했다. 아니면, 내가 그의 마음 안에 들어왔다는 것 또한 나의 착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도덕적 준칙은 자신의 마음을 배반할 만큼 컷 던 것이다. 내가 어떠한 이야기를 해도, 그의 성향을 아는 인물들은, 아니 그의 친구들은 그의 이야기를 들었지, 나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 

 

나는 몇 번이나 말을 했다. 이것은 나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설령 동의 하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은 사실이 모든 증거가 하나로 모일지라도, 나 자신이 편향이 되지 않을 수 없고, 다른 사람의 인생을 망치고 무너뜨리는 판단을 하지 말아 달라고 나는 빌었다. 내 진심을 듣고 , 이야기하고, 정리한 그녀는 내 마음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나를 잘라내기 위해 행동한 것으로 보였다.

 

억울함이었다. 그리고 배신감. 내가 존중하는 사람이, 나의 큰 부분이 되었던 사람이. 잡고 있는 손의 자신의 손을 잘라내는 것도 아니라. 나의 손 또한 잘라 내면서 스스로를 밀어내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때 돼서야 깨달았다.

 

 

팩트는 중요하지 않다.

 

 

나는 그에게 어떠한 보상이나 대가를 바란 것이 아니었다. 단지 그가 믿었던 올바른 가치를 나 역시 믿고 싶었고, 내가 옳다고 믿는 바를 행동으로 옮겼을 뿐이다. 아무런 합당한 근거 없이 사람을 벼랑 끝으로 몰아세우고, 괴롭히는 것을 넘어 그 가족의 안위마저 위협하는 짓은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리가 아님을, 그의 깊은 내면은 분명 알고 있었을 것이다.

 

세상 모든 이가 그의 말에 동의하고 모든 상황이 그를 맹신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더라도, 단 한 사람쯤은 ‘그것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는 그 작은 목소리를 들어주지는 못할망정, 적어도 무참히 보복하지는 말았어야 했다.

 

 

나는 결코 관계의 파멸을 원하지 않았다. 인간의 마음과 관계란,

얄팍한 사실 몇 개로 결코 조종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심연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눈물이 났다.

 

그리고 나는 시계를 보았다

 

달력을 보았다

 

그리고 사진을 보았다

 

그 찬란했던 기억들.
 설령 이들이 나를 의도적으로 배신한 것이 아닐지라도,
 그들이 이토록 잔인하게 행동한다면 
나 역시 그에 합당한 대응을 하는 것이 옳았다.
단순히 최후통첩을 남기거나 관계를 무 자르듯 끊어내는 것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내가 먼저 관계를 단절한다면,
그들은 그것을 빌미 삼아 더 거센 공세를 퍼부을 것이 틀림없었다.

 

자신들과 ‘다른’ 길을 가겠다고 선언한 사람을 집단으로 린치하고,

 

앞으로 나아갈 발걸음조차 묶어버리려 드는 것은 결코 내가 추구하는 이타적인 삶의 방향이 아니었다.

 

나는 그를 사랑하고 아꼈기에, 억지로 그를 바꾸려 들지 않았다.

그저 그의 마음에 작은 선 하나를 그어, 그가 진정으로 바라봐야 할 곳을 넌지시 일러주고 싶었을 뿐이다.

 

나는 자리에 앉아 조용히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다시, 내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걸었다.

선택해야만 했다. 계속 그들의 길에 휩쓸려 갈 것인가, 아니면 그들과는 전혀 다른 나만의 길을 갈 것인가.

결어

이제 나와 웃고, 떠들고, 그리고 즐겼던 이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변화의 길을 가지 않았다. 

내 인생의 관점이 바뀌는 터닝 포인트였다.

 

나는 더 이상 내 마음을 쉽게 열지 않는다.

오랫동안 지낸 사람에게도,

그리고 자신이 먼저열엇으니 상대도 열어야한다는 협박을 하는 사람도 보았다.

자신이 다른 사람을 고칠 수 있다는 오만한 사람도 보았다

나이는 현명함의 지표가 아니라 아집과 고집의 지표인 사람도 보았다

자신이 인생의 비극의 주인공이라고 하는 사람도 보았다

이제야 나는 나의 마음을 본다

지금도

나는 나 자신이 아끼는 자들에게

나의 마음을 열어야 할 것이다. 


누군가는 그림으로 이 생각을 표현한다. 나는 글로 나를 표현한다.

웃긴 건 이게 1편이다.

사실 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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